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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웬 May 16. 2022

칼국수 국물만큼 진한 사랑하시게

20년 전 나를 만난 어느 날

드라마의 폐해였다. 자고로 남녀 간의 데이트라 함은 잔뜩 차려 입고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섬세한 손길로 칼질을 하며 웨이러(오늘 발음 좀 된다)가 따라 주는 와인을 마시며 하는 거라 생각했다. 연애 경험 한 번 없던 20대 청춘시절 누군가를 만났더라면 아마도 빚을 내서라도 그런 흉내를 내려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상상하는 연애는 그렇게 럭셔리한 모습이었다.


환상에서 깨어난 것은 지금의 아내를 만난 이후였다. 취향이 저렴하기로는 나와 용호상박일 정도의 아내는 입맛마저도 고전적이었다. 자주 먹는 음식 이름만 놓고 보면 이게 과연 20대 여성이 먹는 게 맞나 싶을 정도인 할머니 입맛의 아내와 50년 넘게 초지일관 초딩 입맛을 자랑하는 분식 마니아인 내가 유일하게 의기투합하여 찾는 곳은 칼국수집이었다.


그마저도 내부 인테리어가 번듯하고 큼지막한 간판을 달고 있는 식당이 아닌 시장통 구석에 자리 잡아 애써 찾지 않으면 찾기도 힘든 그런 곳을 자주 찾았다. 낡고 오래되어 삐그덕 소리를 내는 의자, 80년대 한옥 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비닐 장판이 주방에 깔려 있고 메뉴라고 해봐야 김밥과 칼국수, 삶은 계란이 전부인 곳. 지금도 아내와 나는 재래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면 옛 추억을 떠올리며 칼국수집을 찾곤 한다.


그날도 늘 그렇듯 바구니 가득 장을 본 우리는 자주 가던 칼국수집에서 이른 점심을 먹기로 했다. 나름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곳이었기에 빈자리 없이 빼곡한 가운데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아내가 물을 따르고 수저를 챙기는 사이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유독 눈길을 끄는 20대 커플을 발견했다.


한 방향을 바라보며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닭살스러운 애정 행각도, 주변 사람들 다 들을 정도의 큰 목소리도 없이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는 그 모습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다. 때마침 나온 음식을 먹으면서도 내 시선은 그 커플을 떠날 줄 몰랐다. '요즘 세상에도 저런 젊은이들이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에 왠지 모를 흐뭇함이 가슴 가득 전해졌다.


"아줌마, 저 쪽에 앉은 커플 한 번 봐봐."

내 말에 아내는 고개를 돌려 그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왜? 젊은 여자 보니 눈이 돌아가나?"

"이 사람이 진짜, 말을 해도.... 난 임자 있는 여자한테는 눈길 안 주거든. 잘 보란 말이야. 저 남자애, 과거의 나를 보는 거 같지 않아? 모르긴 해도 아주 예의 바른 청년일 거 같아. 여자도 그렇고. 둘이 참 잘 만난 거 같아."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아내는 음식을 입에 넣기 바빴다.


이윽고 음식을 다 먹은 그 커플이 일어서는 순간 또 한 번 감탄을 했다. 빈 그릇을 한쪽으로 모아 놓고 냅킨을 꺼내 상을 닦은 남자는 여자가 일어나며 흐트러진 의자를 정돈하고 카운터로 향했다. 두 손으로 카드를 건네고 결제가 끝난 후 카드를 받으면서도 "사장님,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라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모습, 나가면서 여자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 안으며 챙기는 일련의 그 과정들은 가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몸에 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모든 게 완벽했고 내겐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도 그럴 것이 내게 10대~20대는 항상 양아치로 각인이 되어 있다. 직업의 특수성과 근무시간에서 기인한 고정관념 속의 그들은 입에 욕이 붙어 다니고, 수시로 내게 험한 말을 내뱉으며 대들고, 남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 높여 떠들어대는 양아치일 뿐이었다. 언젠가 이 문제로 고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지인과 설전을 벌인 적도 있다. 그때 나는 그분께 그렇게 말을 했다. "당신 눈에는 이쁘고 사랑스러운 제자겠지만 내겐 죄다 양아치야 양아치. 내 눈엔 그런 애들밖에 안 보여."

 

물론 모두가 그렇지는 않음을 잘 알고 있다. 이른 아침 단정한 교복 차림으로 등교를 하며 간단하게 먹거리를 사는 학생들도 있고 20대라 해도 말투와 행동에 있어 기본적인 예의를 갖춘 청년들도 자주 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대면하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어딘가 모르게 공격적인 화법을 구사하며 조금이라도 불쾌하면 당장이라도 주먹 쥐고 달려들 기세인 사람들이다. 이 또한 직업병일 수밖에 없지만 그런 나에게 그 커플이 보여준 행동들은 하루 종일 좋은 기억으로 남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내와 나란히 걸으며 말을 건넸다.

"아까 계산할 때 공손하게 카드 내미는 거 봤지?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거랑. 아무리 봐도 젊었을 때 내 모습을 보는 거 같아."

아내는 말없이 씩 웃기만 했다.

20년 가까이 함께 하다 보니 그 표정만으로도 아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 닮긴 닮았더라. 그런데 한 가지 차이가 있어. 그 남자는 잘 생겼고 당신은 못 생겼어. 그게 차이라면 차이랄까. 그리고 그 커플 말이야.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어.'

분위기 깨는 것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아내이기에 입을 열었더라면 분명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서둘러 화제를 바꿔 아내가 그 말을 못 하게 입을 막았다.


그 커플이 지금도 잘 만나고 있는지는 모를 일이다. 두 사람만 있는 곳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내 눈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고 싶다. 모처럼 사람 사는 맛을 보여준 그 커플이 오래도록 사랑하며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래도 당분간은 칼국수만 보면 그 여자 얼굴...... 아니, 그 남자 얼굴이 떠오를 것만 같다.

이보게 청년, 부디 내 믿음 저버리지 말고 꼭 사랑의 결실을 맺으시게. 그렇지 않으면 내가 많이 슬플 거 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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