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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19. 2020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는 차

장미 가향차, 꽃향기를 맡으면 힘이 솟아요

「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


아니, 요즘같이 업무도 잘 안 풀리고 세상이 모두 협심하여 내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 이 시점에 더 안 좋은 소식이 있을 수 있다니. 대체 그게 뭡니까.


그러나 L팀장의 다음 첫 마디에 아, 그래, 그게 있었지. 라고 생각했다.


「 이번 상반기 고과가 별로 안 좋게 나올 것 같아요. 마음 상할까봐 미리 말해 주려고. 」

「 왜 그런 건가요? 」

「 이유는 사실 나도 잘 몰라요. 」


할많하않. 이유를 모르겠다는 데야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사실 저보다 좀더 많은 대화가 오갔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저 사실이었다. 상반기 고과는 꽝이라는 것. 안 그래도 기분이 바닥을 치는 요즘, 마음에 더욱 빨간 불이 켜졌다.


축 처진 우울한 기분이 강하게 오래 지속되는 경우 우울증이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병리적 증상이 아닌 일상 속의 우울한 기분은 보통 '우울감'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아마도 요즘의 나 또한 그렇겠지. 크게 심각한 것은 아닐 거야, 생각하면서도 공연히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이 들어 '우울한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법'을 검색했다. 이런 때도 포털 검색을 하다니 역시 어엿한 현대의 스마트폰 유저.


안타깝게도 구글은 내게 딱히 쓸 만한 테라피를 제안해 주지 않았고, 터덜터덜 걷던 나는 가끔 가는 동네 꽃집에 시선을 주었다. 꽃이나 하나 사 볼까, 그러면 기분이 좋아질까. 항상 싱글싱글 웃으면서 농담을 건네는,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있는 꽃집 사장님이 요즘 가장 예쁘게 피는 꽃을 추천해 줄 것이다. 만 원 정도에 적절한 꽃 한 다발로 골라 묶어 달라고 해야지.


그러나 공교롭게도 꽃집은 배달 중이라는 팻말이 걸린 채 비어 있었다. 요즘은 꽃집도 배달을 해 주는구나. 역시 배달의 민족인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은 배달이 가능하구나. 다들 참 열심히도 산다. 유노윤호처럼


꽃집 앞에서 잠시 기다렸지만 사장님은 꽤 멀리 배달을 갔는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멍하니 앞에서 기다리기도 애매해져서 발걸음을 돌렸다.




이럴 때는 어떤 차를 마시면 좋을까, 집에 돌아와 고민했다. 너무 진하거나 연하지 않으면서, 적당한 향기가 있어서 기분을 좋아지게 하는 차. 상큼한 시트러스 향도 좋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멘솔이나 민트 향도 좋지만 사 오지 못한 꽃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인지 플라워 가향의 차를 택했다.


많은 플라워 가향 중에서도 장미는 best of best, 항상 인기 있는 블렌딩이다. 향수에도 많이 사용되는 베이스 향인만큼 홍차와도 잘 어울리고, 브랜드마다 특색 있는 장미 가향 차를 많이 내놓는다. 특히 영국인의 장미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듯 영국 브랜드의 장미 가향차 종류와 품질은 상당한 수준이다.


우리집 정원의 심파시 사계 장미. 그러나 내 손은 아니다.


가장 추천하고 싶은 것은 '위타드 오브 첼시Whittard of Chealsea)''잉글리쉬 로즈English Rose', 그리고 '니나스 Nina's''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이다. 사실 이 외에도 포트넘 앤 메이슨의 '로즈 포우총'이나 '니나스'의 '베르사유 로즈' 등도 있지만, 가장 장미향의 밸런스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저 두 제품.


니나스 마리앙투아네트(좌), 위타드 잉글리쉬 로즈 앨리스 에디션(우)


'위타드 오브 첼시'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브랜드라서 국내 정식 판매처가 없는 것이 아쉽지만, '잉글리쉬 로즈'는 워낙 유명한 제품이라 구할 수 있는 루트가 많다. 진하고 강렬한 장미향에 달콤한 향이 가미되어, 틴을 여는 순간 기분을 확 올리기에는 그만이다. 장미가 가득한 꽃밭에서 사탕을 물고 있는 것 같은 즐거움을 선사하는 차.


그에 비해 '마리 앙투아네트'는 좀더 부드럽고 살랑거리는 느낌의 장미 가향차다. 로즈 페탈이 섞여 있지만 장미장미한 느낌보다는 꽃과 과일이 함께 들어 있는 바구니와 같다. 이름에 걸맞게 동그란 분홍색 틴도 예쁘고, 향과 맛도 좋은 차라서 언제 마셔도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성격은 운명'이라고 누군가가 말했는데, 그렇다면 나는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서 끊임없이 고통받으면서 살게 되는 것일까. 내게 남아 있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날 동안 나는 계속 이렇게 고군분투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럴 때는 내 기분에 딱 맞는 한 잔의 차를 고르는 시간이 의외로 꽤 큰 위로가 된다. 정성스럽게 차를 우리고 있다 보면 '차멍' - 불멍과 비슷한 - 타임이 오기도 한다. 이렇게 또 살아나가는 힘을 얻는 것이다. 그래, 이게 다 무어람. 그렇게나 화급을 다투던 수많은 과거의 일들이 이제는 기억도 안 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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