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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luie Jul 21. 2020

비오는 오후의 티타임

빗소리와 어울리는 차의 향기

뜨거운 홍차를 마시기엔 너무나 부담스러운 여름이 지나가고 날씨가 살짝 서늘해지기 시작하면, 따뜻하게 홍차를 우릴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한다. 그러다 어느 여유 있는 주말에 비라도 추적추적 내리면, 어쩐지 들뜬 기분까지 된다. 어떤 홍차를 마셔볼까, 하는 생각에. 이런 자그마한 기대들이 삶에 훈기를 더한다.




1순위로 떠올리는 건 역시 ‘포트넘 앤 메이슨’의 “러시안 카라반RussianCaravan”이다. 내게는 비오는 날의 홍차라는 이미지가 깊숙하게 박혀 있는 이 홍차는, 살짝 스모키한 향과 고소하면서 달콤한 맛이 조화를 이룬다.

포트넘 앤 메이슨, 러시안 카라반

'러시안 카라반'은 18세기 차가 생산되던 동방에서 러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차를 나르던 낙타 카라반을 의미하는 이름으로, 그 이름에 걸맞게 중국의 대표적 홍차인 기문(Keemun)과 우롱차(Oolong)를 블렌딩했다. 베이스가 되는 기문 덕분에 밀크티로 우려도 꽤 훌륭하다.


기문의 고소하고도 약간 스모키한 향과, 우롱의 정갈한 깔끔함이 잘 어우러져서 어떤 때 마셔도 좋은 차지만, 비오는 날에 유난히 잘 어울린다. 훈연향이 비오는 날의 다소 눅눅한 공기를 기분 좋게 잡아 주고, 깔끔하고 구수한 향이 몸을 따뜻하게 해 주기 때문.


틴 케이스 디자인도 그렇고, 왠지 차상들이 사막에서 모래 바람을 피해 쉬면서 마셨을 것 같은 이국적인 분위기도 난다. 낙타에 차를 가득 싣고 유럽으로 운반해 가던 그들에게는 이 차가 어떤 의미였을까? 오래된 역사만큼 수많은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차는 때론 아련한 느낌마저 준다. 그러나 실제론 아마 생업을 위해 개고생한 거겠지




마리아쥬 프레르의 '마르코 폴로Marco Polo' 는 두말할 필요 없이 가장 유명한 홍차 중 하나다. 차를 처음 접해 본 사람들이라도 거의 대부분이 호감을 갖는 이 매력적인 홍차는 그 블렌딩 레시피가 잘 알려져 있지 않기로도 유명한 제품.

태국 출신의 CEO 키티 차 상마니 (Kitti Cha Sangmanee)가 운영하는 마리아쥬 프레르 자체가 블렌딩 레시피를 틴이나 홈페이지에 거의 공개하지 않는다. '중국과 티벳의 꽃, 과일의 향기'라는 애매모호한 설명만 있을 뿐.


마리아쥬 프레르, 마르코 폴로


워낙 인기가 많고 전설적인 차라서 다양한 베이스(백차, 녹차, 홍차 등)로 만들졌고 블렌딩도 다양하게 확장되어 있는데, 그 중 기본적인 '마르코 폴로'가 가장 좋다. 틴을 여는 순간 초콜릿과 코코아향이 부드럽게 코를 감싸고, 그 향이 사라질 때쯤 베리류(딸기, 라즈베리 등)을 말렸을 때 나는 함축적인 단내가 풍겨 온다. 우리고 나서도 그 부드러운 단맛이 거의 사라지지 않는다. 과연 'Velvety (= 벨벳같은 부드러움)' 라고 할 만하다.


사실 어떻게 마셔도 기분이 좋아지는 차이긴 한데, 비오는 날에는 이 차 특유의 달콤한 부드러움이 몸을 따뜻하게 해 준다. '마르코 폴로'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는 두근거림도 그 분위기에 한 몫 하는 듯.




카렐 차펙의 '몽블랑Mont Blanc'은 위의 두 차에 비해서 다소 귀엽고 캐주얼한 느낌이 강한 차다. 일본의 일러스트레이터 야마다 우타코가 운영하는 카렐 차펙이라는 브랜드 자체가 '차의 향과 맛은 다소 가볍지만 캐릭터가 귀엽고 사고 싶은 마음이 물씬 드는' 것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요즘은 맛과 향도 꽤 수준급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몽블랑Mont Blanc'은 밤(Maron)향을 가미한 차다. 밤 퓨레를 사용한 오래되고도 유명한 디저트인 '몽블랑'에서 그 이름을 따왔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래서인지 생 밤의 향보다는 좀더 밤 크림의 향과 맛에 가깝다. (하긴, 생 밤의 향이 차에서 나면 그것도 약간 이상할 듯)


그냥 우려도 괜찮긴 하지만, 밀크티로 만들었을 때 진가가 발휘된다. 진하게 우려서 따뜻한 우유에 넣어서 마시면 밤맛 우유같기도 하고, 그 달콤함에 기분도 좋아지는 차.

(참고글: 설거지가 싫을 때, 밀크티 레시피)


'몽블랑 차'는 사실 이 브랜드에서만 나오는 것은 아니다. 밤과 견과류의 향이 가을에 잘 어울리기 때문에 많은 브랜드에서 시즌 스페셜 혹은 스테디셀러로 출시하고 있다. '몽블랑 케이크'로 세계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파리의 '앙젤리나'에서도 '몽블랑 차'를 자체 판매하기도 한다.

다만 '카렐 차펙'의 장점은 귀여운 일러스트를 보면서 가볍게 차를 마시다 보면 기분도 함께 좋아진다는 것. 티백을 뜯기가 너무 아깝다는 단점은 있다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홍차는 흐리거나 비가 살짝 오는 날에 잘 어울리기도 한다. 홍차의 EGCG(= 폴리페놀의 일종) 성분이 신경 보호 효과가 있어서, 실제 홍차를 자주 마시면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우울한 기분을 예방하는 효과가 일부 있다고 한다. 물론 홍차는 음료이기 때문에, 약과는 다르다. 도움을 준다는 정도. 


다음 비오는 날에는 어떤 홍차를 마셔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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