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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 Aug 04. 2020

자꾸 마셔야 맛있다, 다즐링의 매력

세계 3대 홍차, 다즐링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시인, 《풀꽃》


아름다운 시지만 연인에게 받는 사랑 고백으로는 다소 뜨악한 느낌일 듯한 저 문구는, 내게 항상 '다즐링'이라는 홍차를 떠올리게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Darjeeling, 다르질링'에 가까운 발음이지만 난 '다즐링'이라는 단어의 어감이 더 좋으니 이것으로 쓸 예정이다.


'다즐링'은 인도에서 가장 고급 홍차를 생산하는 고산 지역의 명칭이자, 그 지역에서 생산하는 홍차를 일컫는 말로, '홍차의 샴페인'으로 불리며 (누가 선정했는지 모를) 세계 3대 홍차에도 당당히 이름을 올린 명실공히 '프리미엄급 홍차'이다. 80개 내외의 다원에서 소량만 생산하기 때문에 위조품도 많기로 유명하다.


참고로 세계 3대 홍차는 인도의 다즐링, 스리랑카의 우바, 중국의 기문이다. 세계 몇대, 죽기 전에 어쩌구 하는 것은 대부분 일본 출신의 리스트들이긴 한데, 이 3대 홍차의 근거도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출처와 기준에 대한 의구심과는 별개로, 셋 다 훌륭한 홍차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즐링에도 소위 '등급'이 있는데, 보통 2~3월에 수확하는 '퍼스트 플러시First Flush' 즉 첫물차를 제일 고급으로 친다. 실제로도 티룸에 가서 '뭔지 잘 모르겠는데 일단 고급스러워 보이고 싶다'면 퍼스트 플러시를 주문하는 게 가장 안전하긴 하다.


그 다음은 '세컨드 플러시Second Flush'로 4~5월에 수확하며 무스카텔향이 난다. 6월에 잠깐 생산되는 '몬순 플러시Monsoon Flush', 그리고 과일과 낙엽향이 강렬한 '오텀널 플러시Autumnal Flush'도 있다.


여기까지만 봐도 왠지  '첫물차, 최고급차, 제일 비싼 차' 라는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나 또한 그랬다. 하지만 한참 초보였던 내가, 전세계의 티 매니아들이 달려드는 '올해의 첫물차'같은 걸 구할 수 있었을 리가 없다. 어쩔 수 없이 티 전문점에 가서 퍼스트 플러시를 주문했다. 역시나 비싸기도 비싸더라. 그리고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첫물차의 영접을 기다렸다.


뭐지, 이 짭짤한 녹차인 듯한 홍차는?


기기묘묘한 첫 경험이었다. 찻물의 색상은 거의 녹차에 가까웠지만, 쌉싸름한 맛과 함께 민트향 같은 것이 났고, 동시에 살짝 짠 맛도 났다. 잘못 우린 건가, 했지만 티 전문점으로 이름난 그 곳에서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다.


이럴 때는 다른 사람의 뇌를 빌려서라도 이해를 해야 한다. 홍차 전문서에서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의 대표적인 맛과 향을 찾아보니 '꽃, 머스캣, 푸른 사과향'이라고 되어 있었다. 야, 이건 진짜 믿을 수 없다 이 사기꾼들아 내가 느낀 맛과의 괴리감에 다소 황망함을 느끼며,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와의 첫 조우는 끝났다.




그 후 의식적으로 '퍼스트 플러시'는 피해 왔지만, 홍차 생활을 하다 보면 다즐링을 완전히 피하기란 쉽지 않다. 그리고 좀더 취향에 맞는 '세컨드 플러시'나 '오텀널 플러시'는 맛있게 마셨기에 슬금슬금 '퍼스트 플러시' 정복에 대한 욕망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좋은 다원의 퍼스트 플러시를 접할 기회가 있었다. 사실 이건 내가 '난 퍼스트 플러시의 맛을 정말 모르겠어' 라고 징징거리자 다즐링 애호가인 J가 도움을 준 것이기도 하다.

다즐링 지역의 유명한 다원은 여러 브랜드에서도 싱글 에스테이트(= single estate, 단일 다원) 제품으로 내고 있는데, 그 중 '캐슬턴Castleton'의 차를 마셔보게 된 것. '캐슬턴'은 다즐링의 다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곳 중 하나다. (영국식 이름이지만 인도 다즐링에 있다)


머스캣 향이라더니, 포도 껍질 맛이라는 뜻인가


좋은 다원의 차는 맛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첫 경험에서 내가 느꼈던 맛과 향은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그 독특함과 명징한 캐릭터가 좀더 밸런스가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머스캣' 향이라고 칭해지는 그 향의 정체가 다소 보이는 듯 했다. 과육 자체라기보다는 베어 물었을 때 느껴지는 그 쌉싸름하도고 신선한 껍질의 맛에 좀더 가까웠다. 그리고 독특하다고 느낀 멘솔향은 좀더 부드럽게 녹아들어 있었고, 끝맛에 분명 꽃 향기같은 것이 났다.




좀 알 것 같기도 해. 그런 생각이 들자 가능한 한 많은 퍼스트 플러시를 마셔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브랜드에서도 퍼스트 플러시 라인은 워낙 비싼 제품이고, 유명 다원이면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던 중 구하게 된 '푸타봉Puttabong' 다원의 다즐링. '푸타봉' 다원은 다즐링 지역 최초의 다원으로 19세기 중반에 조성된 곳이다. 캐슬턴이나 마가렛스 호프만큼의 유명세는 없으나 다즐링에서 가장 큰 다원 중 하나로, 인도에서 가장 처음 차의 상업적인 재배를 시작한 곳이기도 하다.


이 곳의 퍼스트 플러시를 마셔 보고, 소위 '농축된 향과 맛'을 처음 느껴 보았다. 어쩌면 이것은 자꾸 마시다 보니 다즐링의 맛에 젖어들기 시작해서일 수도 있다. 그 어느 차에서도 느낄 수 없는 복합적인 맛과 향이 난다는 것이 다소 신기하기까지 했다. (물론 그 맛과 향이 취향에 맞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게다가 기존에 느꼈던 과일향과 톡 쏘는 멘솔향에 더해, 한 모금의 끝자락에 아릿한 꽃향기가 명확하게 느껴졌다.


이것이 다즐링의 오묘한 매력이구나


나는 차를 마신다는 것의 즐거움에 대해 설파하고 다니는 편은 아니다. 어쩌면 취향의 강요로 받아들여질 수 있기에 친한 사람들에게만 좋은 차를 소분해 주면서 접해 보기를 권하는 편이다.


다만 다즐링의 매력을 차근차근, 단계적으로 깨닫는 경험을 하고 나서 차를 '마시고 알아가는' 즐거움이라는 것을 진심으로 느꼈다. 동시에 다른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고, 좀더 적극적으로 이 즐거움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실 이 브런치는 그 결심의 일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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