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하고 포근한 '런던 포그(London Fog)'의 위로
어쩐지 요즘은 글을 자주 쓰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를 마시거나 찻잔을 사는 일은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차 마시기에 가장 좋은 계절은 겨울이라고 생각하는데, 가을도 좋지만 가을은 사실 나가서 노는 때가 많고 - 작년은 슬프게도 좀 달랐지만 - 밖이 추워서 주로 실내에 있는 겨울이 차를 마시며 즐기기에 좋은 계절이다.
이번 겨울은 나름 따뜻한 편이라 그런지, 비와 눈이 많이 왔다. 글을 쓰는 지금도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는 중이다. 이럴 때 간절하게 생각나는, 흐린 안개의 차(Tea)가 바로 '런던 포그(London Fog)'이다.
런던은 변화무쌍한 날씨와 안개로 유명한데, 사실 진짜 유명했던 안개는 1950년대 즈음의 'Killer Fog'라고도 불렸던 런던 스모그다. 정말 '한 치 앞이 안 보인다'라고 할 정도로 심각했던 런던과 당시의 정황을 잘 보여주는 것이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The Crown》 인데, 런던 스모그를 정치적 입지에 잘 활용했던 윈스턴 처칠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아무튼 이 유명한 안개의 도시를 떠올리게 하는 '런던 포그'는 사실 런던이 아니라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처음 만들어진 레시피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는 Buckwheat이라는 카페에서, 단골 고객이었던 Mary Loria를 위해 제조한 특별한 차였던 것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임신을 한 그녀가 카페인때문에 커피를 못 마시게 되자, 얼 그레이 차에 우유 거품을 얹고 약간의 바닐라를 가미해서 커피 대신으로 내놓았다고 한다. 아무리 단골 고객이라고 해도 그 사람만을 위한 음료를 제조해 줄 정도라면 그 카페의 정성도 대단하다 싶었다. 실제로 Mary Loria는 매일매일 카페에 들르는 고객이었다고.
그 레시피가 꽤 인기를 얻었고 결국 스타벅스에서도 메뉴 중 하나로 내놓게 되면서 전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음료가 된 것이다.
국내의 스타벅스에서는 '런던 포그' 메뉴를 본 적이 없는 것 같지만 - 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다 - 얼 그레이 티라떼에 바닐라 시럽을 추가하면 비슷한 맛이 난다. (21년 2월 현재는 얼 그레이 티라떼도 사라져 버린 것 같음. 돌체 블랙 밀크티라는 요상한 이름의 메뉴가 있긴 하다.)
지금의 '런던 포그'의 인지도에는 사실상 스타벅스의 힘이 컸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로맨틱하면서도 어딘지 향수를 자극하는 음료의 이름도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사실은 '밴쿠버 포그'라고 부르는 게 맞겠지만 왠지 '역시 안개는 런던'이랄까 :)
집에서 만들기도 쉬운 편이다. 얼 그레이를 진하게 우린 다음 우유 거품을 얹거나, 거품기가 없는 경우 설탕을 넣은 영국식 밀크티로 만든다. 그리고 바닐라시럽을 2번 정도 펌핑해 준다.
그냥 봐도 맛있어 보이는, 라떼와 비슷한 음료이지만 얼 그레이의 베르가못향, 그리고 달콤한 바닐라가 어우러져 라떼와는 확연히 다른 향을 낸다. 유명한 음료 메뉴에서 얼 그레이를 기본으로 하는 것들이 꽤 있는 편인데, 볼 때마다 홍차의 세계에서 '얼 그레이'가 가진 위상에 대해 다시금 깨닫게 된다. (참고글: 홍차에서 화장품 향이 나요)
곧 입춘이지만 여전히 흐리고 눈발이 날리는 요즘, 에너지가 필요한 저녁에는 '런던 포그'를 한 잔 만들어 마셔보는 것도 좋겠다.
※브런치북도 읽어 주시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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