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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호레 Aug 03. 2021

해남 적응기

쉽지 않아, 시골 살이

취준을 할 때는 이 한 몸 거둬주실 곳만 있다면 북한이라도 가고 싶었다. 워낙에 역마살을 타고난 팔자이기도 하고, 버스 3-4시간쯤이야 이미 엉덩이가 단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겨낼 수 있을 거란 착각을 했다.      

    

 합격 후, 첫 발령 지사가 해남이 떴을 때는 놀라기보단 웃겼다. 아니 정말 해남이라고? 바로 화면을 캡처해서 해남 진도지사가 적혀있는 캡처 사진과 함께 ’ㅋ ㅋ ㅋ’을 가족 단체 채팅방에 남발했다. 전남권역을 썼을 때부터 나 합격하면 해남 갈 수도 있어~라고 장난스레 얘기했었는데 그게 정말 현실이 될 줄이야..이 일을 계기로 친구들에게 말조심하고 살아야 된다를 거의 반 울면서 떠들고 다녔다.           


 처음 시골의 삶의 그렇게 괴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환경과 업무에 적응하기 바빴기 때문에 괴로움을 알아챌 겨를도 없었다. 도시에 살던 때도 퇴근하면 쌀국수 하나 포장해 넷플릭스 보면서 먹는 것을 가장 큰 낙으로 여겼던 나였기에, 쌀국수를 도시와 시골에서 먹는 그 차이쯤으로 여겼다.(사실 해남에서 쌀국수 먹는 것도 쉽지 않다) 연고지에 살 때도 친구들과 가까이 살아도 하루가 머다 하고 꼭 봐야 하는 성격이 아니었으므로 대부분의 휴일을 혼자서 보냈기도 했고.

 그러나 내가 안 하고 안 만나고 안 먹는 것과, 못하고 못 만나고 못 먹는 것은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는 일이었다.


회사 옥상에서 본 전경. 찐 시골이다..



 시골에 산다는 것은 동시에 나의 20대를 잠깐 멈추는 일과 같았다. 유난히 힘든 날 맘 편히 만날 친구가 근처에 없다는 것. 주거래 은행 업무를 보려고 하면 1시간 거리에 목포에 가야 한다는 것. 스타벅스도 물론 마찬가지. 회사 사람들은 넘쳐나는 스타벅스 기프티콘을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목적 없이 대형마트 가서 시간 보내는 게 삶의 큰 낙 중 하나인데, 갈 수 있는 마트가 겨우 하나로 마트라는 것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한 번은 정말 불가피한 사정으로 주말에 해남 사택에 남아있던 적이 있었다. 혼자 카페를 가보겠다고 읍내에 나갔는데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민원인처럼 여겨져서 1차 고통. 이 작은 도시 자체가 나에게 직장과 같이 여겨져서 2차 고통. 주말이 주말이 아니였다. 아니,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면접을 봤는데 해남 발령과 동시에 다른 동기들보다 한 발자국 뒤처지는 기분을 느껴야 한다니..

 내가 반은 선택했고, 반은 선택당해버린 해남 발령이었다. 이 모든 것의 책임의 소재도 불분명했기에 마음껏 누구를 탓하지도 못하고 참을 수밖에 없었다.



 생각할 시간도 지나치게 많은 것도 문제. 9 to 6는 지켜지는 직장이라 감사하면서도 퇴근 후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 속에 갇혔다. 운동도 해보고 책도 읽어보고 회사 사람들과 술도 마셔봤지만, 매일매일 닥쳐오는 퇴근 후의 삶은 도장 깨기에 가까웠다.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 본인은 주말 없이 야근에 치이는 삶을 사느라 그런 여유로운 고민을 할 생각도 없다고, 워라밸이 너무나 충만해서 그런 거라고 부러워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그럼 네가 해남 와서 살래? 란 말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가 이내 머리로는 인정해버리곤 했다. 그래, 그 사람 말에도 일리가 있다. 미친 듯이 일에 치이면 이런 따분하고 우울한 감정에 빠지는 일이 없긴 하겠지. 참 이러나저러나 불쌍한 사람들이다. 월급은 '내가 너를 이렇게 엿 먹였으니까 그에 대한 대가로 매달 보상금을 줄게' 의 줄임말이라더니.. 그 말이 시간이 갈수록 머리와 가슴으로 이해가 된다.

 


   월화수목금 시골에 갇혀 매일매일 주말을 기다리지만, 역설적으로 매주 주말이 돌아온다는 것도 힘들었다. 주말마다 가족, 친구, 연인을 만나고 아, 나에게도 이런 삶이 있었지를 느꼈다가 다시 매번 시골의 삶에 적응해야 한다니.. 이 짓은 매주 나를 시험에 들게 했다. 차라리 갇혀있었다면 그 감정의 빈도를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이것도 정말 갇혀있는 사람들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들리겠지? 하.. 어쩌라는 거야..



 그렇다고 퇴사하고 가고 싶은 새로운 기업이 있다던가, 취준 생활로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참 딜레마다.

 적어도 지금은 시골 탈출 날짜를 d-day로 삼고 하루하루 달력에 엑스 표시를 하는 즐거움으로 견딜 수 있지만, 취준 때는 그런 게 없었다. 막연히 달력에 엑스 표시를 한다고, 스터디 카페에 오래 앉아있으면 되는 기다림이 아니었다. 덕분에 지금도 꾸역꾸역 견디며 다니고 있다. 다들 이렇게 사는 거 아닌가요? 모두들 아무튼 출근에 나오는 직장인들처럼 살진 않잖아?




         






 어느 날 타지에 발령난 회사 대리님과 밥을 먹을 때였다. 일 년 전 같이 해남에서 근무할 때만 해도 이곳을 그리도 괴로워하던 사람이, 이제는 그때가 생각도 안 난다며 대리 승진에 밥 한 번 사지 않는 현재 팀원들에 대한 원망만 토로하기 바빴다.

 

그와의 대화에서 문득 깨달은 것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 괴로운 것들이 미래의 고통에 아주 자연스레 잊힌다는 것. 나의 험난했던 20대 초반과 앞이 보이지 않던 취준생 시절 또한 지나갔듯이 말이다. 지나고 보면 모든 일들이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되어있었다. 그렇다면, 모두 별 것이 아닌 일들이 되는 일들에 지나치게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별 것 아닌 일들에 나의 소중한 오늘을 힘들어하는 게 가여워졌다.

 


 가끔은 생각한다. 해남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란 생각. 애매한 경북 시골 어딘가보다 경상도 사람이 해남 와서 2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면 고생 쫌 했네를 인정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그 인정 누가 해줄진 모르겠지만, 아무도 안 해주면 나라도 나를 찐하게 칭찬 해주려고 한다. 정말 수고했다고. 잘 견뎌냈다고.

 시간이 지나면 대부분의 기억은 미화되고 그날의 온도, 감정, 느낌만 남게 된다. 그날의 감정 온도를 어떻게 정할 것인지는 민원인도, 해남도 아닌 나에게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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