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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Nov 08. 2023

시작은 당근!

몇 주전 주말 아침이었다. 엄마 집에 갔다가 엄마랑 아침 산책을 하고 샐러드를 사다 먹는데, 샐러드 안에 당근라페가 그날따라 맛있었다. 당근라페가 있으니 별다른 드레싱이 없어도 다른 채소를 같이 먹기도 편한 것 같았고 그다지 만들기 어려워 보이지도 않았다. 일단 당근라페 만들기부터 검색!


실제 찾아보니 당근라페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당근을 채 썰고, 거기에 올리브유(집에 있음), 홀그레인머스터드(씨겨자, 이것도 있음), 레몬(레몬즙이 있으니까 대체 가능!),  설탕(이건 없었지만 꿀을 떠올림)을 넣어 만든다고 했다. 아 먼저 소금에 살짝 절여 물기를 빼고.


며칠 전 저녁, 그러니까 일요일 저녁, 몇 주 전 만들어볼까 싶었던 당근라페 생각이 났다. 휴대폰과 지역화폐만 들고 집 앞 마트에 갔는데, 중국산 당근만 있었다. 만드는 김에 왠지 좋은 걸로 만들어 보고 싶은 느낌? 걸어서 40분쯤 거리에 다른 마트로 향하기로 했다. 산책도 할 겸, 큰길이 아닌 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로 가고 있었다. 어? 비가 온다. 아... 오늘 비 온다고 했었지... 아침에 일기예보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난 이미 절반쯤 돌아가기도 애매한 상황. 비가 얼마나 올까 싶어 '비를 좀 맞지 뭐'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비가 그런데 많이 왔다. 핸드폰을 꺼내어보니 '강우'라고 표시되어 있다. 망했군. 이제 눈앞에 마트가 보이는데, 여기서 후퇴할 순 없었다. 직진! 가뜩이나 두꺼운 후드를 입었더니 비를 머금은 후드가 점점 무거워졌다. 늦은 시간이어서였을까? 못생긴 주스용 당근만 남아있었다. 어쩔 수 없지. 당근 3개를 사가지고 나오는데, 워낙 길치인 데다, 비까지 오니, 어느 방향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설마... 동네에서 길을 잃겠어? 하며 나의 감을 믿어보았지만 난 항상 같은 실수를 한다. 허허... 펼쳐지면 안 되는 풍경이 펼쳐진다. 반대 방향으로 왔다.


이제 후드는 꾹 누르면 물이 쭉 짜지는 수준으로 무겁게 물을 머금고 있었다. 당근 3개를 종량제 봉투에 담아 달랑달랑 들고 물에 빠진 생쥐꼴로 집에 돌아가는데, 그 와중에 아파트 단지에 들어서자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다. 다행히 춥지는 않아 감기에 걸릴 것 같진 않았다. 돌아와서 먼저 씻고 물이 떨어지는 옷 빨래부터 한다.


비를 맞고 씻고 나오니 몸이 노곤노곤해져 만사가 귀찮아졌다. 하지만 그 비를 뚫고 마련해 온 내 당근들을 그냥 둘 순 없었다. 채칼을 꺼내 당근을 썰기 시작했다. 문득 설탕대신 꿀을 넣어도 되는 건지? 이렇게 힘들게 구해온 당근인데.... 망하게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그렇지만 저 비를 뚫고 또 나갈 수는 없지. 다시 열심히 채를 썰었다. 그렇게 만든 내 당근라페. 맛이 있다. 그런데 맛이 있어야 한다고 스스로 세뇌하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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