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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Dec 22. 2023

시인과 보디빌더

어제는 고깃집에서 회식을 했다. 서른 명쯤 모인 자리였다. 원래 단체 회식은 그렇게 크게 재미있진 않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그 정도로 성공. 어제의 회식자리는 노잼과 화기애애한 분위기의 중간 정도였다.


우리 테이블에 K가 찾아왔다. 그는 이 회식자리에서 가장 높은 사람. 그 테이블에 있던 7명 모두에게 이런저런 덕담과 약간의 잔소리(공부하라는)를 건넸다. 뭐랄까? 노잼이긴 하지만 어른스러운 모습도 함께 있었달까? 그런데 그가 같은 테이블에 있던 A에 대해 문득 이야기를 시작했다. "A가 전에 역도를 열심히 해서,  보디빌딩 대회도 나가고 그랬어." 너무 일만 하고 그러지 말고 재밌는 것도 해야 한다는 이야기 끝에 예를 든 것. 


그 자리에 있던 우리는 '역도'와 '보디빌딩' 모두 쉽게 접할 수 있는 종목은 아니다 보니 신기하다는 눈빛과 함께 취미를 열심히 파는 사람에 대한 어떤 존경심 같은 것을 함께 표현했다. 그런데 정작 A는 동공지진을 일으키더니 "저는 역도는 해본 적이 없는데요???????"하고 당황했다. 하지만 K는 "역도 해가지고, 보디빌딩 대회 나갔었잖아~ A는 보디빌더야!" 하며 한 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는 A 정말 역도를 했던 적도, 보디빌딩 대회를 나간 적도 없었다. A는 "제가 전에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이 좋긴 했죠."라고 가벼운 자랑을 하며 대화를 마무리했다.


이제 A가 K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K님이 한시를 좋아하시잖아요." 시작은 무난했다. K는 "내가 어쩌다 한시에 관심이 생겨서, 300편 정도 공부를 했는데, 그리고 났더니 한시를 쓸 수 있겠더라고"라며 대답했다. 그러자 A가 "그래서 한시집도 몇 권 내셨어요." 이번엔 K가 동공지진. "아니 내가 한시를 좋아하긴 하지만, 시집을 낸 적은 없는데????" A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가 분명 돈 주고 사서 시집을 읽었는데요???" 물론 K도 시집을 발표한 적은 없었다. 


K는 운동을 좋아하던 A를 무려 역도를 열심히 하는 보디빌더로 기억하고 있었고, A는 한시를 좋아하는 K를 한시집까지 출판한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의 오류가 너무도 구체적이어서 다들 한바탕 크게 웃었다. 


얼마 전 우연히 마주친 고등학교 동창이 기억났다. 나는 그녀와 안부를 묻고 근황을 전하다 그녀의 눈이 괜찮은지 물었다. 내 기억으로 그녀는 눈앞에 물방울 같은 것이 계속 떠다니는 불치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 그녀는 그런데 금시초문이라는 듯 알아듣지 못했다. 우리는 대화를 해 나가다, 그녀는 기억하지도 못하는 어떤 일시적인 질환을 내가 혼자 멋대로 불치병으로 기억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서로 재밌어서 함께 웃었다. 우리의 기억이 이런가 보다. 보디빌더도, 시인도, 불치병의 소녀도 모두 우리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미지 출처: 챗GPT를 통해 생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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