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이렇게 흘러도 기억나는 교양과목이 있다. 대학교 1학년때 수강신청을 잘못해 듣게 된 '국제 정치의 이해'. 무려 3시간짜리 수업이었다. 쉬는 시간 따위 없이 3시간 연강으로 진행되었고, 3시간 동안 '한국말을 해도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일이 있을 수 있구나'를 배웠다. 유일한 장점은 월요일 낮 수업이었다는 건데, 월요일 첫 수업이라 늦잠을 잘 수 있었고, 동생들이 매우 부러워해서 거들먹거릴 수 있었다.
하루는 양손에 먹을 걸 들고 그 수업에 갔다. 수업 바로 전 시간엔 강의실이 비어 있어서, 간식이나 먹고 수업을 들으려고 했던 것 같다. 아마 한 손엔 단 커피, 한 손엔 빵? 30분 전 즈음 도착했던 나는 강의실 문이 닫혀있자, 양손에 먹을 걸 들고 열다 보니 힘조절을 못해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런데... 어라? 수업 중인 게 아닌가? 아...? '분명 이 시간엔 강의실이 비었었는데...' 하며 "죄송합니다"하고 돌아 나오려는데 들려오는 교수님 목소리, "자네, 이 수업 듣는 학생 아닌가?".
'아? 같은 교수님이시네?' 하고 다시 강의실을 바라보는데, 내 동기들은 빨리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수업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내가 듣던 그 수업의 그 사람들이었고. '아? 수업시간이 앞당겨진 걸 내가 공지를 못 받았나?'하고 활짝 열어젖혔던 문을 조심스레 닫고 강의실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친구들이 속삭인다. "왜 늦었어?" 그래서 시계를 보니 나는 30분 일찍 온 것이 아니라 30분 늦은 것이었다. 시간을 착각했던 것. 당당한 지각을 한 셈.
문제는 당당하게 문을 활짝 열여재 끼고 지각을 한 후, 교수님이 나를 좀 골려먹기 시작했다는 것. "000을 아나요?" 하는 문제제기 또는 화두를 던지고자 하는 수사 의문문을 꼭 내게는 진짜 질문으로 써먹으셨는데, 난 진짜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매번 동공지진이 났다.
그러다 하루는 늦잠을 잤고, 뭘 먹을 틈도 없이 지하철을 타고 얼른 학교에 갔는데, 마침 빈자리가 제일 앞자리 밖에 없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날따라 그 수업 내용이 너무 어려워 따라갈 수가 없었고, 빈속이라 배도 고팠던 나는 정신이 점점 아득해져 갔다. 나의 베프는 내게 "넌 정신이 몸을 지배하는 애야"라고 말하곤 하는데, 그날 정신줄을 놔버리자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고 어지럽기 시작했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교수님은 강단에서 제일 앞자리에 앉은 나의 꼴값을 지켜보다가 애매한 표정을 지으시더니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라며 2시간 만에 수업을 끝내주셨고 내게 괜찮냐고 물으셨다.
학생들은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이었으므로 유일했음) 수업을 일찍 끝내주시자 약간 환호성을 질렀던 것도 같은데 나는 속으로 '훗 내 희생으로 자유를 얻은 것을 알까?' 하며 친구들을 재촉해 밥을 먹으러 갔던 기억. 물론 교수님이 수업을 끝내주시자 식은땀도 나지 않고 어지럽지도 않았다. 배는 여전히 고팠지만. 발표시간에 운 좋게 내가 바보라는 걸 눈치챈 졸업을 앞둔 4학년과 같은 조가 되어 그 선배가 시키는 것만 했더니 성적도 그럭저럭 잘 받았던 것 같다. 교양 수업 신청은 신중하게, 1학년 1학기 국제정치의 이해에서 배운 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