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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몬 Aug 19. 2023

경마장에 가본 적 있나요?

새로운 세계

대학생 때였다. 누군가 경마장에서 알바를 해보지 않겠냐고 해 따라가 보았는데, 당시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시급이 굉장히 높은 알바였다. 나는 주 1회 일을 하기로 했었는데, 내 또래, 그러니까 20대 초반 친구들도 있었고, 취업 준비생들도 있었고, 아이 키우다 오랜만에 일을 시작한 분들도 계셨고 연령대는 다양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난 취업이 되는 바람에 한 3개월 밖에 일하지 못했었는데, 짧은 기간이었지만, 아직도 잊지 못하는 여러 기억들이 있다. 


먼저 나는 돈을 잘 헤아리지 못해서 그 구역 반장님의 골칫덩이였다는 점을 고백한다. 젊고 빠릿빠릿한 애를 바쁜 창구(바쁜 창구는 하루에 마권을 수천만 원 팔기도 했다)에 앉히고 싶으셨는데, 어린애가 들어오긴 했는데, 돈 세는 게 느리고 영 탐탁지 않아, 나를 앉혀놓고 돈 세기 훈련도 시켜보시고 일 잘하는 야무진 친구 옆자리에 앉혀놓고 일을 배우게도 해보았는데, 영 효과가 없었던 것.


그때 마권을 10만 원까지 구매할 수 있었는데(요즘은 모르겠음), 그 10만 원을 부채꼴처럼 촥 펼쳐 재빨리 확인해야 했다. 물론 계수기가 있었지만, 한 번 펼쳐 확인한 후 계수기에 넣는 것이 매뉴얼이었다. 나는 영 속도가 붙질 않았고, 뭔가 손이 야물지 못해 어설픈 느낌이 났다. 반장님은 결국 포기하고 나를 구석자리에 배치하셨다. 그 자리에도 간혹 큰손들이 방문하기도 했지만, 주요 고객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었는데, 이분들은 소소하게 5백 원 또는 천 원짜리 마권을 사는 분들이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의 주요 업무는 뛰어다니기였다. 예를 들어, 10만 원짜리 마권의 배당률이 3.5라고 해보자. 그러면 35만 원을 내어주면 되는 일이다. 그런데 5백 원짜리 마권의 경우, 1,750(500*3.5) 원을 내어드려야 했다. 보통 동전은 미리 준비해두지 않았다. 보통 만 원짜리 이상 마권을 사니까. 그런데 내가 있던 구석자리는 천 원이나 5백 원짜리 마권이 많았다. 나는 "잠시만 기다리세요! 동전 좀 바꿔올게요!"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반장님이 계신 자리로 뛰어가야 했다. 


보통 마권을 살 땐 불안 초조한 사람들도 당첨이 된 후에는 마냥 너그러워지기 때문에 "다녀와^^"하며 웃는 낯으로 대해주시곤 하셨다. 그러다 간혹 좀 크게 당첨된 분들(10배라든가...)은 내게 잔돈은 넣어두라며 지폐만 받아 가신 분들도 계신다. (그럼 시제 맞추기가 곤란했다. 몇 백 원이 차이가 나버리니까.) 


하루는 내가 있던 구석자리에서 10만 원짜리 마권을 샀던 사람이 꽤나 높은 배당률(아마도 50배 이상?)로 게임에서 이겼다. 큰돈이 나가야 하자, 반장님은 내 곁으로 와서 나를 도와주셨다(못 미더우니까, 그렇지만 인정. 지금도 난 돈을 잘 못 헤아린다 ㅋ). 그러자 그 마권 주인이 내게 5만 원짜리 한 장을 주려고 했는데  나는"죄송합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다음 주에 알바를 하러 가 자리에 앉았는데 그 아저씨가 좀 떨어진 곳에서 지우개에 5만 원짜리를 동여매어 내게 표창처럼 던지고 사라졌다. 


게임에서 이긴 즉시 기분이 좋아 내게 5만 원을 주려고 했던 건 이해가 가지만, 굳이 다음 주에 나타나 비밀결사 조직에서 임무라도 수행하듯 할 일인가? 내가 그 지우개에 묶인 5만 원짜리를 들고 어리둥절해하자 주변 사람들과 반장님이 이야기하셨다. 도박하는 사람들은 징크스가 중요하다나? 그 아저씨의 징크스는 아마도 행운의 마권을 판 곳에 반드시 사례를 하는 것일 거라는 것. 반장님은 웃으면서 "너 해라"하신다. 오 예! 그날 경마장 언니들(지금 공무원, 선생님, 가정 주부가 되었다)과 회식을 했던 기억이다. 


경마장의 진정한 승자는 나의 단골손님들, 즉 5백 원짜리 천 원짜리 마권을 사서 소소한 재미를 즐기던 분들이란 생각이 든다. 근사한 말들이 역동적으로 뛰는 모습도 구경하고, 친구들과 소소한 내기도 하고, 작은 돈이라도 게임에서 이기면 기분이 좋으니 친구들에게 음료수라도 하나 사줄 수 있고, 날려도 그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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