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Zhu Nov 06. 2019

스물둘 성인이 엉엉 울고 있었다.

월동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멈칫

방으로 들어오던 룸메이트 C가 걸음을 멈췄다. 원래도 크고 동그란 눈을 평소보다 배는 키우며 물었다. 

“언니 왜 그래? 괜찮아?”

놀라는 게 당연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분간도 안 되는 것에 젖은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엉켜 덕지덕지 얼굴에 붙었다. 땀이 뱄다 그대로 말랐다 다시 또 배기를 몇 번, 티셔츠는 그냥 보기에도 눅진했다. 목까지 끌어올렸던 이불은 손을 놓으니 스르르 미끄러져 가슴께 어디쯤에 걸쳐 있었다. 스물둘이나 먹은, 자기보다도 두 살이나 많은 성인이 못 봐줄 꼴을 해서는 침대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으니 당황하지 않는 게 이상할 것이었다.




내가 중국에서 머물던 곳은 북위 41°의 선양(沈阳)이란 도시로 베이징(北京)보다도 위에 있다. 장갑, 목도리뿐 아니라 귀마개까지, 단단히 싸매고 다녔지만 서울의 겨울과는 비교할 수 없게 추웠다. 수업을 듣는데 으슬으슬 한기가 왔다. 딴 데로 새지 않고 곧장 기숙사로 와서 상비약으로 챙겨갔던 콘택600 한 알을 먹고 잠을 청했다. 네 시간쯤 지나 저녁에 깼을 때 ‘한숨 잔 덕에 한결 나아져 있었다.’로 마무리되었으면 좋으련만, 나아지기는커녕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콘택600은,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열제는 아니다. 명시된 효능, 효과에 의하면 비염과 축농증 약이다. 쥐고 있던 게 그것뿐이라 다른 수가 없었지만 따지자면 오한에 효과가 있을 리도 없었다. 필요한 건 해열제였다. 같은 건물에 사는 미국인 교수 P와는 얼굴만 겨우 알고 지낸 사인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마흔 중반쯤이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확실히 나보다는 제대로 상비약을 갖추고 계신 '어른'이셨다. C가 친히 끓인 죽 두 그릇을 해치우고 해열제를 두 알 삼켰다. 땀이 나면서 열이 내렸다.


안심했다. 약을 한 번 더 먹고 밤새 푹 자기만 하면 거뜬히 나을 거라 믿고 침대에 몸을 누였다. 다시 눈을 뜬 시간은 새벽 두 시, 얼마 못 자고 깬 셈인데 정신이 너무 말똥말똥했다. 땀을 한 차례 흘린 터라 몸이 찝찝하여 샤워를 했다. 미친 짓이었다. 정신이 들었으면 ‘완전히 나을 만큼 충분히 쉬지 못했다.’는 객관적 판단을 내렸어야 했는데, 어쩌자고 나는! 감기가 나가려다 '옳다구나' 하며 다시 왔다. 학교 갈 채비를 하려는데, 비실비실, 내 몸인데 내 의지와 별개로 흐느적거린다. 해열제를 다시 두 알 목 뒤로 넘기고 쓰러졌다. 이 때도 푹 자지 못하고 두어 시간 만에 눈이 떠졌는데 나는 무슨 기운인지 벌떡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수업에 갔다. 종강이 며칠 안 남은 때여서 지각을 할지언정 결석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국민학교 때부터 왜 그리도 출석에 목숨을 걸었나 모르겠다. 그래서 남은 건 개근상이라 적힌 종이 한 장뿐인데. 여하튼 그 어디 쓸 데도 없는 열의가 또 발동하여 체감온도 영하 삼십 도는 족히 되는 거리를 걸어 학교를 갔다. 당연히 병은 제.대.로. 도졌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정신이 든다고 생각했다니,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음에 틀림없다.


두들겨 맞은듯한 몸살, 깨질듯한 두통, 침을 삼킬 때마다 쓰린 목, 코막힘, 기침, 소화불량까지 감기의 증상으로 댈 수 있는 것은 몽땅 왔다. 그동안 내가 겪은 감기는 단계가 있었다. 편도선이 붓는다. → 한기가 오면서 몸살을 앓는다. → 콧물이 난다. → 낫는다. 엄연히 제 순서를 지켰던 증상들이 이렇게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경우는 정말이지 처음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고열, 열을 내리는 게 급선무다. 열만 내려도 두통도, 몸살도 조금 덜해질 테니. 두 알, 듣지 않는다. 또 두 알, 여전히 뜨겁다. 몇 번을 더 털어 넣었더라, P가 준 해열제가 동이 났다. 조금만 움직여도 팔다리가 쑤신 것을 참고 얼굴, 손, 발에 찜질도 멈추지 않건만 몸은 식지 않았다. 몸이 너무 뜨거우니 잠은 전혀 청할 수도 없었다.

사람이 감기로 죽기도 하겠구나


메르스(MERS) 같은 어려운 이름의 무서운 병들을 알기 전이었다. 감기는 언제나 대수롭지 않은 병이었고 엄마의 간호를 받으며 며칠 누워 지내면 아팠다고 말하기도 민망스럽게 멀쩡해져 있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거였다. 아기가 열이 나면 옷을 다 벗기고 찬물에 맨몸을 풍덩 담그기도 하는 게 그제야 이해가 됐다. 고열이 계속되면 아기뿐 아니라 성인도 속수무책 죽겠다 싶었다. 그때 나는 내가 정말 이러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크리스천인 나는 하나님께 울면서 살려달라고 부르짖었다. 그때 외출했던 C가 돌아왔던 것이다.


한바탕 난리가 났다. C는 염치 불구하고 다시 P를 찾아갔고 P는 동료 교수 T에게서 해열제와 호올스(Halls)를 받아 가져다주었다. T는 뒤따라 본인의 가습기를 가지고 올라왔다. 헐레벌떡 뛰어온 두 사람은 나를 직접 보더니 대뜸 ‘hospital’을 내뱉었다. 그 지경이 될 때까지도 중국어가 능숙하지 않아 병원은 엄두를 못 냈다. ‘간마오(感冒:감기)'라는 단어도 아직 몰랐을 때였고 영어가 통할 지도 의심이었다.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도 치르기 전의 중국이었다. 관시(关系:인맥)는 병원도 예외가 아니라고 들었고 병원 간판은 달아 놨지만 돌팔이만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미 내 상태는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고 '어른'들의 말을 듣기로 했다. 껴 입을 수 있을 만큼 두껍게 옷을 입고 가까운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종합병원 진료 절차가 복잡한 것은 중국도 우리나라와 같았다. C와 나는 중국어와 영어에다 손짓 발짓까지 섞어 여기저기 물어가며 병원을 헤집고 다녔다. 모든 순서와 검사 (피를 뽑고 폐 사진을 찍었다.) 후 진단은 비교적 간단히 내려졌다. ‘flu virus’ 밤새 링거 주사를 맞았다. 나는 살아났다.




1999년 12월 30일 일기를 바탕으로 다시 썼다. 모두가 Y2K를 염려하고 있을 때 나는 내가 21세기를 못 볼 수도 있겠구나 했다.


당시의 기억으로 나는 감기가 무섭다. 그래서 아주 작은 신호만 와도 바로 대비 태세에 들어간다. 심하지 않은 오한 정도라면 집으로 곧장 가는 선이겠지만 이미 목이 잠겼거나 열이 약간이라도 있다 싶으면 주저 없이 병원에 들른다. 삼일 치 조제약까지 짓고 나면 마트로 간다. 병가까지 낼 정도는 아니면 식사는 주로 회사 구내식당에서 해결하므로(신청하면 죽도 제공된다.) 토마토나 오렌지 주스만 한 병 사고 말지만 며칠 드러누울 모양새면 인스턴트 죽과 간식거리, 집에 식수가 충분하지 않다면 물도 한 병 챙긴다. 집에 오자마자 할 일은 보일러와 온수매트를 켜기, 공기도, 바닥도 데우려면 시간이 걸린다. 가습기에 물을 채우고 침대맡에 갑 티슈와 물수건도 가져다 놓는다. 가볍지만 따뜻한 재질의 옷으로 갈아입고 발이 차면 안 되므로 수면양말까지 챙겨 신는다. 이제 눕는다. 그리고 절대 무리는 하지 않는다. 


몸이 이상 신호를 보낼 때 누가 채근하지 않아도 스스로 병원을 찾는 부지런은 어른이 되어가는 하나의 표시라고 한다. 스물둘 어찌할 바 몰라 엉엉 울던 덜 자란 어른은 이제 제 몸은 알아서 돌보게 되었다.




출퇴근길 공기가 차갑다. 월동 준비를 시작했다. 거실에 러그를 다시 깔았고 아직 켜지는 않지만 침대에 온수매트도 깔아 뒀다. 겨울옷은 옷장 서랍으로, 여름옷은 정리박스로 맞바꿨다. 가습기와 히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도 체크했다. 그리고 오늘 독감 예방 주사를 맞았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왼쪽 어깨가 욱신거린다. 열심히 항체를 만들고 있는 거겠지.

작가의 이전글 뭐 하는 거야, 애도 안 낳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