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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Feb 05. 2020

갚아야 하는 마음

감히 갚을 수 있긴 할까요?

설날 점심쯤, 큰외삼촌에게서 전화가 왔다.

“엄마도 없는데 혼자 있지 말고 점심 먹으러 와.”


아빠가 돌아가신 후 친가와는 자연스럽게 왕래가 없어졌다. 언니네가 시댁에서 명절을 쇠고 늦지 않게 오지만, 이후로 명절이라고 모이는 것은 엄마와 나, 둘뿐이다. 365일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이 일터라 세 번 중 한두 번은 명절에도 근무를 서기 때문에 그나마 출근하지 않는 경우여야 아침 일찍 갈 수 있고 퇴근 후 겨우 갈 때도 잦다. 그래도 명절이라고 엄마는 갈비찜을 하고 전을 부치지만 명절과 일상의 구분이 모호해진 지 이미 오래란 얘기다. 이번 설은, 엄마가 연휴를 이용해 이모와 여행을 가시게 되어 근무를 서야 하는 나는 도리어 잘되었다 싶었다. 음식 준비를 도와드릴 수도, 아침 일찍 갈 수도 없는 게 마음이 쓰였는데, 당신 혼자 안 계시게 되었으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외삼촌은 내가 자주 명절에 일하는 줄은 모르시고, 항상 엄마와 함께 보내다 혼자 명절 아침을 맞았을 거라 생각하신 것이다. 결혼도 않고 혼자 사는 조카가 설마 굶지는 않겠지만 외롭지는 않을지 걱정하신 모양이다. 회사라 하니 일 끝내고 와서 저녁이라도 하라신다. 예상보다 일이 많아서 퇴근이 늦어졌고 상행 고속도로는 귀경 행렬로 이미 빨간색이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 전화를 드렸다. 시간이 너무 늦을 듯 해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고 할 참이었는데, 뒷말을 하기도 전에 늦어도 괜찮으니 꼭 오라고만 거듭하셨다. 더는 어른의 말씀을 마다할 수 없어 찾아뵙기로 했다.


저녁 일곱 시가 훌쩍 넘어 도착해 문을 연 순간, 왁자지껄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당연히 큰외삼촌 내외분만 계실 줄 알았는데 둘째, 막내 외삼촌, 숙모들까지 우르르 현관에 나와 나를 맞아 주시는 게 아닌가. 내 얼굴을 본 지 오래되었다며 나를 만나고 간다고 모두 기다리셨다는 것이다.


삼촌들과 담소를 나누는 사이 식탁에는 나만을 위한 상이 차려졌다. 마지막으로 떡국이 올려지고 식사를 시작했다. 숙모 세 분은 내가 식사를 하는 내내 식탁에 함께 계셨다.

“이 묵 좀 먹어봐, 막내 숙모가 직접 쑨 거야.”

“갈비가 얼마나 연하게 됐는지 몰라, 한 번 먹어 봐.”

“떡국 국물 진하지? 큰삼촌이 며칠을 고았는지 아니? 만두는 남자들이 다 빚었어, 맛이 괜찮니?”

막내 숙모는 굴비를 다 바르시더니 다음으로 새우 껍질을 벗겨 건네주셨다.


“며칠 굶었니? 엄청 잘 먹네.”

큰외삼촌께서 주방으로 오시더니 웃으면서 말씀하셨다.

“너무 맛있어요. 저 내일 점심까지 아무것도 안 먹어도 되겠어요.”

솔직히 늦은 점심을 한 터라 배가 많이 고프지 않았다. 그런데 배가 부른데도 계속 들어갔다. 진짜 모두 맛있기도 했고, 설사 맛없어도 남김없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뭐라고 삼촌, 숙모들께서 이렇게까지 반겨 주시고 챙겨 주시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감사히 맛있게 먹는 것밖에 없었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그랬다. 외가 친척들은 우리 자매에게 넘치게 잘해 주셨다. 꿈과 신비의 나라, 롯데월드 어드벤처에 처음 데려가 주신 분이 큰외삼촌이셨고, 아마 그날 빅맥을 받아 들고 햄버거의 신세계 또한 처음 맞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교사셨던 둘째 외삼촌은 학기가 시작될 때마다 참고서와 문제집을 거의 대다시피 해 주셨다. 방학이 되면 대구 이모네서 일주일씩 머물곤 했는데 일이 바쁘신 중에도 한두 번은 꼭 나들이를 시켜주셨다. 도저히 시간을 못 내실 때는 퇴근 후 저녁시간에 영화관에라도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설날 세뱃돈뿐 아니라 만날 때마다 용돈을 쥐어 주셨고 해외 출장이라도 다녀오시면 우리 선물까지 빼놓지 않으셨다.


그런데 당시에는 고마운 줄도 잘 몰랐다. 어른이 되어 나에게도 조카가 생기고 나서야 그러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독립하기 전 통근 버스 정류장이 좀 더 가까운 이유로 꽤 긴 기간 언니와 함께 살았던 터라 나는 조카들과 무척이나 친밀한 편인데도 그만큼 잘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먼저 손이 가는 내 자식이 따로 있지 않으면서도 그렇다. 안정된 직업이 있어도 하루하루 살아내는 게 녹록하지 않다. 이모, 삼촌들도 비슷했을 것이다. 당신들의 삶이 결코 평안하지만 않았을 것이고 신경 써야 할 일들이 산적해 있었을 텐데 어떻게 그렇게 한 치 건너인 언니와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어 주셨을까.


엄마는 삼남 이녀의 장녀시다. 언니와 내가 요즘도 종종 하는 말이 ‘엄마 머리를 반만 닮았어도 좀 더 똑똑했을 텐데……’ 일 정도로 공부 머리가 있으셨지만 엄마는 대학을 가지 못하셨다. 그 시절 흔한 여자들처럼 기술을 배워 바로 직업 전선으로 나섰다. 엄마의 벌이가 동생들 공부에 직접 보탬이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변변찮은 남자를 만나 결혼 후에도 고단한 밥벌이로 사는 누이의 삶이, 맏이가 아니었으면, 그래서 원하던 길을 갔더라면 다를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고 마음을 쓰신다 생각된다. 그래서 큰 누이의 아이들에게 더욱이 무심할 수가 없으셨던 건 아닐까.


엄마의 공 덕분이라 하여도 내가 받는 대접은 넘치고도 남고, 설사 과하지 않다 하더라도 내가 대신 받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 이모, 삼촌들께서 베풀어 주신 마음은 두고두고 갚아야 할 빚일 것이다.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을지, 갚을 수 있긴 한 건지 모르지만 평생 잊지 않아야 한다. 이제 대부분 은퇴하시고 조용히 소일거리를 하며 지내신다. 이번 설처럼 부르시기 전에 내가 먼저 자주 찾아봬야겠다고, 그거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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