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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Mar 18. 2020

그곳에서는 나도 감수성이 폭발했다.

어느 해 통영 여행의 그 숙소

“집에 있으면 항상 똑같은 천장이잖아. 숙소에 누워서 천장을 보는데 ‘여기 천장은 또 이렇게 생겼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TV 프로그램 [트래블러]에서 배우 강하늘이 뱉은 말을 우연히 들었다. 집중해서 보던 중이 아니고 TV를 켜 놓은 채 다른 일을 하다 들은 터라 앞뒤 어떤 상황에서 나온 줄은 모른다. 다만 ‘여행 중 머무는 곳을 저렇게 볼 수도 있구나.’ 새로웠다.


친구 S의 여행기를 보며 종종 감탄한다. 빠지지 않는 것이 호텔 후기인데, 객실 구조와 침대 품질부터 비치된 어메니티까지, 또 이용할 수 있는 각종 편의시설에 대한 정보도 꼼꼼하다. 그렇게 세세한 것까지 분석할 수 있는 이유는 ‘어떤 환경에서 머무는가’가 그녀에게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일 테다. 그녀뿐 아닐 것이다. 사실 ‘숙소’는 여행 중 ‘집’을 대신한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각자의 기준은 조금씩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까다로운 편은 아니다. 내 몸 하나 큰 불편 없이 누일 수 있는 독립적인 공간이면 충분하다. 그렇다 보니 선택할 때도, 머무는 동안에도 꾸밈새를 유심히 보는 일은 드물다. 아마 그래서 무심한 중에도 강하늘의 저 말이 들렸나 보다. 그의 감수성에 조금 놀랐다.


솔직히 샘이 좀 나려는 차, 한 곳이 생각났다. ‘어느 여행의 숙소’로 기록된 것은 같지만 다른 무게로 기억되는 장소다. 이름부터 특별했던 ‘봄날의 집’의 ‘작가의 방’. 감수성 터졌던 ‘숙소’가 나도 있었다.




몇 해전, 혼자 통영을 여행했다. 비행기 타고 열 몇 시간을 가나 버스로 반나절이면 닿는 곳이나 당일 여행이 아니면 가장 큰 고민은 ‘여자 혼자’ 안전하고 편안하게 잘 곳을 찾는 것이다. 숙박 어플을 열심히 뒤졌으나 마땅찮아 네이버에서 막무가내 검색을 시도해 발견한 예쁜 이름이 ‘봄날의 집’이었다. 한 출판사가 단독 주택을 개조해 책방과 함께 단 네 개의 객실로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였다. 예술도시로서의 통영에 의미를 두어 방마다 테마를 정해 꾸몄고 각각 ‘화가의 방’, ‘장인의 다락방 1,2’, ‘작가의 방’이라 이름 지었다. ‘책방’, ‘단독 주택’, ‘작가’, 뭐가 더 필요하겠는가. 게다가 ‘작가의 방’은 1인용 객실이었다. 다른 정보는 뒷전이었다. 예약이 이미 찼을까만 걱정되어 서둘렀다. 따지고 들면 시내에서 꽤 거리가 있어 호텔을 고를 때 교통 관점의 위치를 우선 고려하는 보통의 나하고는 참 거리가 먼 행동이었다. 그러나 앞뒤 없이 메일을 보낸 덕에 그해 여름, 짧게나마 마음이 좋은 공간에 내가 있었다.


2017.08.10 @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봄날의 집'


보통의 주택이었다. 그러나 파랗고 노랗게 파스텔 톤으로 처리한 벽이 초록 나무와 어우러져 감히 예뻤다. 안으로 들어서면 공용 공간인 거실과 부엌이다. 넓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마다 손님이 모두 들어도 열 명이 넘지 않으니 충분한 공간이었고 오히려 아늑했다. 입구를 따로 분리해 별개의 장소였지만 거실과 바로 이웃하여 책방이 있었다. 책방을 지나 복도 끝이 ‘화가의 방’, 부엌 뒤로 난 계단을 오르면 다락방이 나오는 구조였다. ‘화가의 방’과 ‘장인의 다락방’은 주제에 맞게 볼거리가 많다 들었다. 부엌에 손님들을 위해 가져다 둔 머그잔마저도 전영근 화백이 직접 그려 만든 수제라고 했으니 얼마나 귀한 작품들로 방을 꾸몄을지 짐작이 되었다. 그리고, 내가 지낼 작가의 방은 부엌 앞쪽으로 현관 옆이었다.


작가의 방
통영에서 나고 자란, 혹은 통영을 사랑한 문인들의 작품과 그 작품의 배경을 순차적으로 소개합니다.

소개처럼 한쪽 벽에는 문인들의 캐리커처가 그려진 액자들이 있었고, 그 가운데 박경리 선생님의 글귀가 있었다. 그리고 책장에는 [토지]를 비롯한 그분들의 책이 꽂혀져 있었다. 가구는 단출했다. 침대, 그리고 책상과 의자가 전부였다. 오성급 화려한 호텔에 비하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방이었다. 그러나 작가가 지내기에 부족할 게 무어람. 노트북만 있다면, 아니 종이와 펜만 있으면 충분했다.


2017.08.09 @ 경상남도 통영시 봉평동 '봄날의 집' '작가의 방'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며 칭찬이 자자한 통영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듣던 대로 볼거리도, 먹거리도 많았다. 그런데 그 여행에서 가장 진한 기억은 어째 ‘그 집’, ‘그 방’이다. 글솜씨가 없기는 매한가지나 그래도 지금은 브런치에서 작가라 불러주기라도 하지, 그때는 정말 막연히 소망만 키우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 방, 그 책상에 앉았을 때, 쓰기만 하면 나도 바로 등단할 착각마저 들었다. 겨우 일기 몇 줄을 끄적이고 말았으면서 말이다. 제대로 쓰지는 못한 채 한참을 스탠드를 켜 놓고 앉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백열등 노란 불빛이 참 낭만적이었다. 이튿날에는 비가 온다는 핑계 아래 바깥 구경을 마냥 미루고 거실에서 책을 읽었다. 책방이 바로 옆이기도 하지만 거실 책장에도 책은 많았다. 그중 하나에서 운영자인 강용상 건축가, 정은영 ‘남해의 봄날’ 출판사 대표의 이야기도 만났다. 업무 스트레스가 많던 중에 ‘이러저러한 과정을 거쳐 이렇게 사는 방법도 있구나’ 생각했다. 당장 그분들처럼 지방 어디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용기는 없지만 위로가 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여행을 마치면서 또 와야지 다짐했었다. 흔한 말처럼 통영은 또 봐도 좋을 도시였고 비싼 비행기 티켓을 끊어야 하지도 않고, 무엇보다 비워지고 채워지는 방이 있으므로 꼭 그래야지 했다. 그런데 다음 해인가 게스트하우스를 닫는다는 메일을 받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분명 있겠지만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그래도 '봄날의 집'을 운영해 주셔서 단 한 번이지만 작가도 아닌데 '작가의 방'에서 지낼 기회를 주신 두 분께 감사한다. 기회가 된다면 책방에라도 가야지 다짐을 조금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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