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inZhu Apr 19. 2020

좋은 본보기를 잃었다.

그의 장점들을 되새겨본다. 닮아야겠다.

월요일은 원래도 차가 막혀 출근이 늦어지는데 코로나 이후 주말이 지나면 입구에서 일일이 체온 측정을 한다고 더 세월이다. 이미 시간이 다 되어 사무실에 오자마자 자리에 앉을 틈도 없이 아침 리더 미팅에 참석해야 했다. 그런데 옆자리 L 부장은 이미 출근한 것을 분명히 봤는데, 회의실에 나타나지 않았다. 회의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는 책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 오늘이구나.’


L 부장은 A Line의 J 부장과 자리를 맞바꾸게 되었다. 서로 Line이 달라도 결국 한 팀이라 Line 간 인사 이동은 종종 일어난다. 누가 어디로 가고 오는지 관심 밖일 때도 있지만 반대로 내가 움직이지 않더라도 나와 밀접한 인사도 있다. 직속 상사가 바뀌는 이번 경우가 후자에 속할 것이야 당연한데, 이전의 같은 때보다 유독 마음이 더 착잡했다. 내 위로 온다는 J 부장이 나보다 연차가 낮은 후배인 이유도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솔직히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또 조직으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이 가장 괴로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보다는 L 부장이 떠난다는 것이 더 심란했다.


L 부장과 오래 함께 일했다고는 할 수 없다. 지금 맡고 있는 과제에 L 부장이 합류한 지는 일 년 조금 더 되었을 뿐이다. 눈만 봐도 서로의 의중을 알만큼 합이 맞았던 동료였거나, 함께 한 세월이 무시할 게 못 되는 동료 이상의 관계였던 것은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 길지 않은 기간이지만 바로 밑에서 L 부장을 보며 생각했었다. ‘우리 팀에도 저런 리더가 있을 수 있구나.’ 십여 년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뭣 같은 상사들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지만, ‘닮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좋은 본을 잃었다.


아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버틸 수는 없는 일, 계속 옆에서 보며 배울 수는 없게 되었지만 그간 닮자고 다짐했던 그의 장점들을 되새겨본다.




작든 크든 한 조직의 리더면 조직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다. 그런데 권한만 내세울 뿐 책임은 지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때는 잘 모른다. 그러나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응하는 태도에서 리더들의 자질이 종종 드러난다. 제조업 Fab. 은 아주 미미한 불량에서부터 제법 덩어리가 큰 공정 변경까지 별의별 일이 매일 수없이 일어난다. 엔지니어는 그때마다 판단을 하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위로 올라갈수록 결정에 대한 책임의 무게는 커진다. 그런데 어떤 리더들은 결정을 회피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미룬다. 그러한 상사들이 많지는 않지만 아주 없지도 않았다. L 부장은 그렇지 않았다. 본인이 해야 할 업무는 물론 스스로 했고 실무 엔지니어들이 결정하기에 부담을 느끼는 문제에 대해서도 먼저 나서서 감당했다. 부하직원들이 리스크가 있는 일도 믿고 추진할 수 있게 해 주는 상사였다.


차, 부장급 인사 교육에 가면 현 20,30 세대가 얼마나 다른지 설명한다. 시대가 변했고 세대 간 차이도 크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교육을 받는다고 해서 살아온 세월이 다른데 이해와 소통이 쉬울까. L 부장은 1998년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보다 나이로나, 경력으로나 십 년 조금 모자라게 차이가 나는 나도 가끔 이십 대 친구들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한다. 아무렴 그는 나보다 세대 차이를 더 크게 느낄 것이다. 그런데 L 부장에게서는 동년배들 중 흔한 ‘라떼 꼰대’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회의 중에나 업무 보고를 받을 때도 물론이고 회식 자리에서도 정치 이슈 등 이야기 주제가 올라왔을 때 그는 주로 젊은 친구들의 생각을 묻는 쪽이었다. 혹 의견이 다른 경우에도 충분히 들은 후에 자신은 어떤 면에서 다르게 생각하는지 얘기하는 것을 여러 번 봤다. 수없이 강조되는 경청을 정말 잘하는 리더였다.


‘내리사랑’이란 표현을 빌어다 이렇게 쓰면 경홀할까. 회사에는 ‘내리지짐’이 있다. 억지에 가까운 업무 지시를 받거나 논리와 거리가 먼 질책을 받을 때 ‘내리지짐’을 의심한다 내 바로 위 상사가 파트장으로부터, 파트장은 팀장으로부터, 팀장은 또 그 위, 그렇게 거슬러 올라간 어디에서 시작된 일, 소위 ‘까라면 까’로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수직 구조의 조직이면 아마도 어디나 조금씩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업종에 따라 부서 간 발생하기도 한다. 담당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만 업무 성격에 따라 갑을 관계가 형성되기도 하고 거기서 또 ‘내리지짐’이 발생한다. 예를 들면, ‘A 부서에서 이렇게 요청했으니까 그대로 해’ 이런 식이다. 실무 엔지니어는 앞뒤 없이 이렇게 전달되어 온 지시와 질책을 납득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여기에 내가 보아온 대부분의 리더들은 ‘나도 괴로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그러니 따지지 말고 그냥 해’였다. 설명하기보다 오히려 자신의 노고를 헤아려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경우가 더 잦았다. 그런데 L 부장은 달랐다. 나는 L 부장 아래 그룹원이었지만 직급이 같은 부장이다 보니 리더 미팅에 함께 참석을 했고 대외 부서 업무도 대부분 함께 했다. 위로부터, 외부로부터 어떤 지시와 피드백이 오는지 알았다. 때로 정말 말도 안 되는 질책이 올 때도 있었고 리더들만 있는 자리에서는 L 부장이 그에 대해 큰 소리를 내는 것도 종종 봤다. 그런데, L 부장은 단 한 번도 그룹원들에게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황을 설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는 하여도 ‘내리지짐’의 형태는 전혀 아니었다. 사장이 시킨 일을 누가 거스를 수 있을까, 결국 해야 하는 일일 때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그냥 시키기’가 훨씬 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최대한 부하직원들의 이해를 구하는 리더라면, 나중에라도 그런 리더가 시키는 일은 이유를 모르고도 따를 수 있지 않을까.




L 부장이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은 2주 전에 들었다. 코로나 때문에 회식은 할 수 없었지만 커피정도는 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하길, 지난 2주 우리 그룹은 바빠도 정말 너무 바빴다. L 부장은 끝까지 ‘함께’ 바빴다. 이동하기 바로 전날인 일요일에도 출근해서 우리 업무를 함께 했다. 그래서 그가 옮기는 날이 다 되어 오는 것도 우리 모두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미 이동이 결정되었으므로 본인 성과가 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인수인계만 정확히 한다면 지금 진행 중인 일에 대해 그에게 책임을 물을 사람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끝까지 자기 역할을 다했다. 닮아야 할 점이 또 하나 더해졌다.


짐 정리가 마무리되면 커피 한 잔 사드리며 인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내 콜밴 서비스와 통화하는 소리가 뒤로 들리길 그럴 시간도 없이 바로 출발해야 하는 모양이다. 결국 제대로 인사도 못한 채 겨우 셀만 빠르게 한 바퀴 도시고 가셨다. 감사한 마음은 결국 전하지 못했다. 속으로만 꼭 건승하시길 빌었다.


작가의 이전글 그곳에서는 나도 감수성이 폭발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