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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Apr 22. 2021

언박싱, 그 순간을 위한 쇼핑?

[더뮤지컬 아카이브 00-20] 구매기

‘고객님의 소중한 상품이 금일 배송 예정입니다.’

오후 두 시쯤 도착한 문자였다. 좀 무심해도 될 것을 퇴근을 서두르다가 그르친 일은 없었을까 뒤늦게 걱정할 만큼 그때부터 내내 마음이 들떴다. 집에 와서도 택배기사님만 눈 빠지게 기다렸다. 마침내 박스를 받아 안았을 땐 진심으로 기뻐서 짧은 탄식마저 나왔다.


이것저것 뭘 많이 사들이는 편이 아니다. 뭣보다 쇼핑을 즐기는 쪽이 못된다. 특히 온라인 쇼핑의 경우 서핑력이 성패를 가를진대 귀찮음이 먼저 고개를 든다. 그래서 한 달에 한 번 정도 주문하는 식료품과 생필품, 그리고 책 구입 정도가 내가 하는 온라인 쇼핑의 거의 전부다. 이렇다 보니 택배 오는 일이 자주 없긴 하다만 오매불망 기다릴 일은 더욱 아닐진대, 말인즉슨 이날 그 박스 안에 든 것은 냉동만두나 신간소설이 아닌, 조금 특별할 수도 있는 무엇이었다.


작년 봄 200호 발간에 대한 축사를 남긴 지 반년이 채 못되어 잡지 [더뮤지컬]의 휴간 소식을 들었다. 대다수의 콘텐츠를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누릴 수 있는 시대에 매달 한 권 종이책을 만드는, 안 그래도 녹록지 않았을 이들에게 코로나가 아주 불을 질렀구나 싶었다. 하지만 야속한 마음은 오히려 잠깐, 내가 애정을 쏟던 때나 까맣게 잊었던 때나 매달 자리를 지켰던 [더뮤지컬]이, 이제 작정을 하고 사보려고 해도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아쉬움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 중 전해 온 유튜브 채널과 굿즈 소식은 폐간이 아니라 휴간이라는, 당장 잡지 발간은 못할지언정 어떻게든 ‘더뮤지컬’을 지탱하겠다는 의지 같았다. 응원을 보태고 싶었는데 마침 [더뮤지컬 아카이브 00-20] 굿즈가 발표되었고, 아카이브북이라면 휴간의 아쉬움도 조금은 달래 주리라 믿어 주저 없이 주문을 넣었다.


문제는 이후였다. 아카이브북은 사전 예약을 통해 일정 금액이 확보되면 제작에 들어가는 펀딩 방식으로 진행됐다. 오늘 주문해서 다음날 받는 게 대수롭지 않은 로켓배송 시대에 펀딩이 달성되어 제작이 결정되었다는 통지를 받기까지만 열흘을 훌쩍 넘겼다. 이후로 제작 기간 약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예고된 기다림이었으므로 견디기 수월했다. 약속된 날, 메시지가 와서 당연히 ‘배송 중’ 일 줄 알았는데 ‘배송 정보 변경 안내’였다. 배송은 주문자 정보가 최종 확인되는 삼일 후로 미뤄졌다. 한 달을 넘게 기다렸는데 삼일쯤이야! 고분고분 그저 날짜를 꼽은 끝에 드디어 발송을 시작했다는 메일이 왔고 좋아서 소리를 다 지를 뻔했다. 그런데, 바로 다음날 어이없는 공지가 떴다. ‘어느 배우의 이름이 누락된 부분이 발견되어 수정 스티커를 함께 배부할 것이며 이 때문에 배송은 추가 지연된다’는 내용이었다. 타이핑 오탈자도 아니고 무려 배우 이름을 빼먹는 실수도, 재제작은 아니더라도 스티커 작업이 아닌 동봉이라는 대책도, 그래서 ‘또’ 지연이라는 것까지 어느 하나도 납득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렇지만, 또 잠자코 기다렸다. 어느새 마음은 언제가 됐든 오기만 제대로 오길 바람이었다.


따져보니 주문을 넣은 후 두 달에 가깝다. 감격의 탄식이 나올 밖에. 보물 단지처럼 모셔와 바닥에 내려놓고 잠시 숨을 골랐다. 택배 상자 뜯는 게 이리도 떨릴 일인가. 크게 심호흡 한번, 혹시라도 안의 책을 건드릴까 조심조심.


택배 상자 뜯는 게 이리도 떨릴 일인가


'딱 거기까지’였다.

안에 든 상품을 꺼내 들었을 때 저만치 떠 있던 마음이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아주 잠깐 마땅한 호들갑을 떨기는 했다. 앞뒤는 물론 옆태까지 유심히 살펴보고 담긴 사진들을 흐뭇해하며 훑었다. 그러나, 그리고는 바로 덮었다. 이제 책장에 잘 꽂아 두기만 하면 되겠다고 순순히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찌 이리 빠르게 마음이 식었을까? 스티커를 붙여야 하는 문제의 누락 부분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어처구니없는 위치였고 아카이브라는 말에 품었던 기대와는 구성도 적잖이 차이가 있었다고 하면 조금은 설명이 될 것이다. 하지만 온도차가 이렇게까지 큰 진짜 이유는 ‘애가 달만큼 달았다가 더 이상 애달지 않아서’이지 않았을까. 마침내 ‘내 것’이 되었다는 기쁨은 극히 찰나, 이미 가졌으니 갖고 싶다 염원할 것도 실물을 봤으니 궁금할 것도 이제 없었다. 더욱 그리 오래도록 기다린 탓에 간절하기가 커질 대로 커졌었으니 내리막이 더 가파른 게 어쩌면 당연했다.


문득 쇼핑이 가지는 의의는 바로 이 언박싱에 있지 않나 생각했다. 사용보다 소유에 기운 쇼핑의 경우 ‘내 것’으로 확정되는 순간 퀘스트는 완성되고 이후의 활용은 딱히 중요하지 않을 테다. 그러니 ‘개봉의 순간’이 이 쇼핑의 정점일 수 있었다. 어떤 물건을 장바구니에 담은 순간 기대와 걱정이 함께 시작된다. 배송이 완료될 때까지 기다리는 내내 마음은 상승곡선을 탈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물건이 눈앞에 완전히 드러났을 때 상상으로 채웠던 모든 궁금증이 해소되며 곡선은 빠르게 하향하고야 만다. 그 사이 꼭대기에서 일어나는 일이 언박싱인 것이다. 유튜브나 블로그, 등에서 언박싱 자체로 콘텐츠가 되는 것도 이제 이해가 됐다.


펀딩 사이트는 배송 이후 오히려 전보다 더 시끌시끌한 것 같았다. 불량에 대해 책임을 묻는 글들이 많았는지 신청자에 한해 환불 절차를 밟는 모양이었다. ‘나도 환불을 받을까.’ 나 또한 실망한 이유를 몇 가지는 구체적으로 댈 수도 있었다. 또 ‘더뮤지컬’ 아카이브북이라는 게 실용과는 정말 거리가 멀었다. (뮤지컬 아카이브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제 없어도 그만일까. 아카이브북이 나에게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이 지난 것은 분명했다. 더 궁금할 것도 더 기대할 것도 없었다. ‘이미 내 것’이 되었다. 그런데, ‘이미’가 불러오는 무심함은 ‘내 것’ 일 때였다. 소장하려던 마음이 아직 유효하다면 계속 ‘내 것’이어야 했고 그래야 무심할 수도 있었다. 언박싱이 쇼핑의 정점일 수는 있지만 쇼핑의 목적을 대체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결론이다.


환불을 요구한 사람들의 마음도 충분히 짐작은 갔다. 그저 뮤지컬을 사랑하기에 적다고 할 수 없는 돈을 지불했는데 받아 든 책이 그만큼의 가치에 닿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배신감도 느꼈을지 모른다. 나의 경우는 속상함에 조금 더 가까워서 차이가 생겼을 테다. 20년 발행되는 동안 절반 이상을 구독했기 때문에 사실 아카이브북에는 내가 이미 본 기사들이 더 많을 것임에도 ‘기록’의 의미를 담아 한 권으로 묶는다는 건 특별했다. 몇몇 부분이 거슬리긴 하나 그 특별함을 모두 상쇄시키기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십여 년 쌓인 정 때문인지 제작진에게도 실수를 덮을 수야 없겠지만 비난보다는 다독이고 싶은 마음이 조금 더 컸다. 결국 속상하긴 하나 처음 구매를 결정할 때 마음은 어디 사라지지 않고 역시 그대로였다. 그러니 아카이브북은 계속 그 자리에 있을 것이었다. 관심받지 못한 채 책장에 꽂힌 그대로.


시간이 한참 흐르면 그 기록을 펼쳐 ‘유심히 ‘살피는 날도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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