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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Zhu Dec 05. 2022

이게 뭐라고...... 두었을까.

버리는 중 알쓸민잡 - 1. 문서정리

이사를 결정했다. 불가피한 상황은 아니었고, 다만 지금 집에서 더 살 건 아니라고 판단했다. 처음 이곳을 선택했던 이유들 중 여전한 장점들이 있지만 살아온 시간이 생각을 바꾸기도 하니깐. 이사를 결심하니 그때부터 집안에 뵈는 것들이 죄다 ‘짐’으로 다가왔다. 처음 독립해 나올 때는 이삿짐센터도 부르지 않은 채 차로 몇 번 오가고 말았는데 살림이 많이도 늘었다. 강산이 변하는 세월, 십 년을 모조리 드러낼 수야 없겠지만 ‘최대한 버리기’를 마음먹었다. 그 과정 중 알쓸민잡, 알아둬야 쓸데없는 민주의 잡생각


파쇄기가 절실할 줄이야. 처음 한두 장이야 ‘촤악’ 그 소리가 시원하게 들릴 만큼 가뿐했다. 그런데 슬슬 손목이 저려와 동작을 멈추고 주무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옆을 보니 찢어진 종이 조각이 벌써 수북, 비교적 중요한 각종 문서들을 넣어 두는 서랍 한 칸을 열었을 뿐인데...... 분명히 당시에는 ‘반드시’ 보관해야만 했을 터, 그러나 이미 기한이 넘어 효력이 없어진 서류들과 동일한 내용이 해마다 갱신되어 이중, 삼중인 것들이 많이도 쌓여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이도 저도 아니고 그냥 지금 보니 굳이 챙겨 두기까지는 아닐 것들도 상당했다. 그렇게 한 무더기를 버리고 남은 문서들은 그 종류대로 다시 정리했다. 계약서 같은 진짜 중요한 문서들을 따로 추리고 낱장인 것들은 클리어 파일 하나로 모으니 깔끔했다. 서랍 절반이 비었다.


교문을 나오니 엄마가 기다리고 계셨다. 왈칵 울음이 쏟아졌다. “망했어.” 수능 한파가 있었다고 기억하는데 추운 줄도 모르고 엄마 어깨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울었지 아마. 갑자기 이십 년도 더 지난 수능을 떠올린 건, 그렇다, 아직 갖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서랍을 정리하는 중 당시의 성적표가 발견된 것이다. 1,2 등 하는 우등생도 아니었고 악착같은 언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태평한 성격이라 초중고 통틀어 시험을 못 봤다고 울어본 적은 없었으니 그날은 나도, 엄마에게도 별난 장면이 됐다. 그런데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해 수능은 이후 꽤 오래 회자되는 불수능이었다. 내 점수도 낮았지만 남들도 만만찮았는지 백분위는 본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고 염두에 뒀던 곳에 무난히 합격했다. 하지만 수능을 떠올리면 비교적 순탄했던 나의 대입과는 너무도 달랐던 K가 함께 생각나 마음이 무겁다. 그렇게 어려웠던 수능에 이어 바로 다음 해는 전혀 변별력을 갖추지 못한 물수능이었고 보기에 따라 K는 그 피해자가 됐다.


수능 성적에 맞춰 대학을 정했고 같은 전공의 대학원을 거쳐 취업까지, 어쩌면 내 경우는 수능이 인생을 꽤 좌우하긴 했다. 그러나 주변을 보면 대학 입시의 결과대로 삶이 줄 세워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는 고리타분한 항변을 하려는 게 아니라 지극히 속물적인 기준을 들이대도 그렇다. [SKY 캐슬] 같은 드라마가 방송되는 나라이니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말을 뱉기는 조심스럽지만 성적표를 보니 ‘이게 뭐라고......’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닌가? 그래도 버리지 않고 이리 오래 두었던 걸 보면 ‘뭐긴 뭐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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