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lway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min Oct 27. 2020

 

 꽃을 좋아했다. 꽃의 색과 이름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서 어떻게 자라왔는지도 관심이 없었다. 단지 그것에 매혹되어 버린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는 게 좋았다. 꽃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을 했던 때가 있었으나 그것은 누군가의 생일이나 기념일에 고작 꽃 한 송이를 주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꽃은 그야말로 누군가의 애정을 듬뿍 받아 자라온 것들. 꽃을 사고 판다는 건 사람의 애정을 사고파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흐를수록 색과 향이 얕아진다고는 하나, 그것들 앞에서 아름다움의 우열을 가리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피고 지는 순간이 다른 존재들일뿐, 그들의 존재 이유는 사랑받기 위함이란 것이 분명하다.


 나는 살면서 꽃을 꺾어본 적이 없다. 모든 꽃에는, 그 안에 있는 무엇이 살아 움직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끝까지 키울 자신도 없었고 볼 대로 다 봐놓고 생명체 비스름한 이것을 바닥에 휙 던져버리는 사람처럼은 절대로 되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냄새를 맡거나 사진을 찍고, 혹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곳에 직접 데려가 보여주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꽃밭을 좋아했다. 산들 한 바람과 구름 아래 끝없이 펼쳐진 꽃들을 보면 그 꽃들에 대한 책임감이라던가 버리는 것에 대한 죄책감 따위는 결코 없을 테니까. 바라보다가 웃고 마냥 좋아만 하면 그만이니까. 이것들이 나를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없어 나는 이것들을 무한히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꽃에 이름이 있고 꽃말이 있다는 게 낭만적이다. 아마 몇 천년, 아니 몇 만년을 거슬러 올라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으니, 분명 하나의 언어라고 봐도 좋겠다. 꽃마다 담겨있는 의미가 달라 마음을 대신 전달하기에 좋았을 것이다. 나는 겨울을 좋아해서 동백꽃을 유독 좋아했는데 꽃으로 마음을 표현한다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동백꽃의 꽃말은 애타는 사랑. 오직 겨울에 피는 꽃이라 벌이 아닌 새에게 수정을 맡겨 그래서 동백꽃은 향이 안 난다고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내가 그 향을 처음 맡았을 때, 이게 화향인가 하며 바보처럼 헤벌쭉 웃음이 나왔다.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물었다. '향이 얼마나 좋으면 그리 웃어?' 나는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몰라 긍긍 하다가 떠오른 단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랑. 사랑의 향이 나. 그래, 그건 분명 사랑의 향이었다. 그 향을 내 온몸에 덕지덕지 바르고 싶었고, 뜨거운 불속에 들어가 도자기마냥 굳어지고 싶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사랑한다는 말 대신 동백꽃 한 송이를 내밀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그 사람은 꽃에 코를 가까이 대고 냄새를 맡더니 배시시 웃었다. 사랑이 맞는 것 같다고 했다. 동백꽃의 향은 내 주위에 넘쳐났다. 꽃은 정말 사랑인가봐. 라일락은 첫사랑, 튤립은 사랑의 고백, 안개꽃은 사랑의 성공. 대부분의 꽃말은 사랑과 밀접하지만, 그중엔 간절한 마음도 있었다.

'나를 잊지 마세요' 물망초의 꽃말이다.


 한 번은 나 자신에게 물었다. 시들어 버린 꽃도 아름다운 것인가. 나는 이걸 아름답게 볼 수 있는가. 미련한 세월의 흐름을 먹고 자란 꽃들. 그 세월이 오직 사랑만 받고 자란 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부러울 텐데, 애정을 못 받은 꽃이 시들면 정말 '시들어 버린' 꽃이 돼버린 것만 같다. 그러니까 이미 죽어버린 꽃에 물을 준다는 건 미련을 못 버린 사랑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미 떠나간 사람에게 마음을 주는 것은 그 사람을 잊지 못해 발버둥 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말이다. 결국 시들 대로 시들어버린 꽃에 물과 애정을 준다는 건, 꽃을 위한 게 아닌 나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 만다. 좋았던 순간들을 꽃에 감정 이입하여 마치 물을 주면 그 기억들이 조금씩이나마 유지되는 것처럼. 그제야 후회 없이 사랑하라는 말이 참 와닿기도, 멀기도 한다는 걸 느끼고는 새로운 사람을 만나 또다시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고, 사랑을 하는 거겠지.


 내가 좋아하는 모든 꽃을 한데 모아 짓이겨 그것을 몸에 바르고 싶다. 물을 줄 필요도 없고 햇빛을 쐬게 할 필요도 없고 그저 꽃이 풍기는 향에 취해 이곳저곳 떠도는, 가는 곳마다 꽃밭이 있고 사랑이 느껴지고 내가 죽는 순간까지 그 꽃들의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나 자신을 사랑하면 그만이다. 그래야 아름답다. 꽃이라는 건.

매거진의 이전글 겨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