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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Nov 30. 2020

홈스테이

 멀리 떠나고는 싶은데, 떠나기도 싫은 마음이었다. 헷갈렸다기보다는 정말 그 두 개의 무엇이 혼합되어 있어서. 마냥 쉬고 싶은 게 아니라 배우고 느끼고 싶은,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놀고먹고 잔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없는 최소한의 마음이었다. 그래서 결정했다. 가까운 곳보다는 멀리 있는 곳. 친숙한 곳보다는 낯선 곳. 그리고 바다가 있는 곳. 아일랜드. 지금이 아니면 영영 못 가겠다 싶어 급하게 항공권을 끊었고 나는 그걸 도피유학이라 생각했다.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마음과 떠나고 싶은 마음이 같았다면, 그래서 더 쉽게 결정할 수 있었더라면, 그건 아마 손에 꽉 쥐고 있는 것보다 오히려 놓았을 때 더 확고해지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결핍을 채우고 싶을 뿐이었다.


 더블린 공항에 내린 날은 늦은 밤에 비까지 오던 날이었다. 유학원 관계자분이 픽업을 해주셔서 숙소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지만, 날씨의 첫인사가 축축한 비라는 것에 나는 이곳에 온 걸 잠시 후회했다. 나는 2주 동안 지낼 홈스테이를 배정받았다. 샌디코브라고 불리는, 더블린에서도 부자들이 산다는 동네였다. 학원은 일부러 더블린 시내가 아닌 외곽지역으로 결정했다. 한국인이 적은 나라에서 그나마도 적은 동네에 살아야, 정말 다른 세계구나 하는 마음이 들 것 같았다.

그 동네는 작은 항구마을이었다. 기차역 앞에는 바다가 있고, 그 옆엔 카약이 쭉 늘어져 있었다. 항구의 끝에는 커다란 등대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바람을 쐬러 이곳에 산책을 하곤 했다. 그 비릿한 바닷냄새 옆에는 아이스크림 트럭이 있었고 이 추운 날씨에 저걸 먹는 사람이 있나 싶었다. 내 옆에 있던 꼬마가 트럭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을 주문하는 걸 보고 나는 그 생각을 바로 그만두었다. 추위를 안 탈 정도로 피가 뜨거운 사람들. 비를 맞으며 바다를 보는 사람들. 어디를 가도 바다 냄새가 진하게 났다. 비린내를 싫어하는 내 코가 살짝 고장 난 것 같았다. 냄새가 좋았다.


 내가 지냈던 홈스테이는 정말 집다운 곳이었다. 케케묵은 빵 냄새와 채 타지 않은 숯불 향이 곳곳에 있었고, 비가 온 후의 바람은 라디에이터에 삼켜지면서 오히려 따듯하게 느껴졌다. 가족사진이라고 할 사진은 다 같이 모여서 찍은 게 아니라 각각의 커다란 증명사진을 벽에 걸어놓은 것이 전부였다. 그들만의 일대기 같았다. 그곳의 억양이니 날씨니 했던 것들은 티비나 책과는 많이 달랐고 나는 오히려 그게 더 좋았다. 그러니까 비가 오고 멈추기를 10번이나 반복한다는 것도 그렇고, 비를 쫄딱 맞아도 웃을 수 있는 사람들도 그렇고, 그걸 보고 따듯한 커피 한 잔 건네주는 게 그렇게도 좋았다. 떠나길 잘했다는 마음과 동시에 떠나기 싫은 마음이 든다. 그러다 비로소 나는 이미 떠났다는 걸 체감하게 되는데, 그건 몸이 으슬으슬하게 시린 것과 비슷했다. 여기도 언젠가 떠나고 싶어질 까봐. 정말 그런 날이 올까 봐.


 내 옆방친구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왔고, 앞 방은 오스트리아에서 온 자매가 살고 있었다. 모두 영어 공부를 하기 위해 왔다고 한다. 대화를 몇 번 해보니, 동양인이랑 대화하는 건 처음이라 굉장히 신기하단다. 나름 한국말을 공부했는지, 다짜고짜 나를 사랑한다고. 나는 하염없이 웃다가 한국에 꼭 한 번 놀러 오라고 했다. 떡볶이든 삼겹살이든 내가 천국을 보여주겠노라 다짐했다. 그래야 내 체면이 산다. 예고편 개념으로다가 팔을 벗고 당차게 한국 음식을 만들어주고 싶었지만 아차, 아시안 마켓이 여기서 1시간 거리라는 게 떠올라 조용히 그 생각을 접었다. 집주인인 베르니는 빵집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시즌이라 얼굴 보기가 쉽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에 출근해서 저녁 늦게 온다. 아침에는 식탁에 덩그러니 남아있는 시리얼과 밀크 티 한 잔이 전부였고, 점심에는 전 날밤에 그녀가 만들어 준 샌드위치와 과일을 먹었다. 저녁이 되면 다 같이 모여 밥을 먹을 수 있었지만 베르니와의 식사는 딱 한 번뿐이었다. 

다른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때, 무슨 말인지 모를 때가 있어 계속 되물어 본다. 고맙게도 그들은 짜증을 내거나 싫어하는 티를 내지 않고 오히려 몸을 이리저리 꼬으며 바디랭귀지까지 구사해 준다. 오스트리아 자매 중 둘째가 대뜸 종이에 내 이름을 써보라길래, 한글자씩 꾹꾹 눌러 담아 써줬다. 그 애는 와 하며 이쁘다고 한다. 이쁘다고. 거 참, 이쁜 것도 많다. 나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다고 했고, 그녀는 내 이름이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 내 이름의 의미? 글쎄, 그게 뭘까 생각하다가 내 이름에 '꽃 영' 자가 들어간 것이 떠올랐다. 꽃. 이름의 의미는 잘 모르겠고, 안에 꽃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녀는 거봐 이쁜 거 맞네라고 하며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는다. 웃음이 났다. 이뻤구나. 내 이름.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홈스테이의 2주는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이곳에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었지만, 크리스마스에는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돌아온다고 해서 연장은 힘들다고 했다. 다행히 지낼 곳을 찾았지만, 아쉬움이 많이 들었다. 내 표정에 입술이 삐죽 나온 걸 본 건지 그녀는 언제든 이곳에 있을 거라고 말한다. 나중에 놀러 오라는 말도 아니고 어디에 갈 거냐고 묻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바뀌지 않는 종착지 한마디였다. 그리고 그 표정이 너무 진지해 정말 내가 길을 잃어도 이곳에 있어줄 것만 같다고 믿었다. 다음에 꼭 만나자는 약속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먹었다. 그날따라 나는 밥을 꼭꼭 씹어먹었다.


 내가 이곳에 와서 배운 첫 단어. 스테이. 길게 머무는 것은 아마 그곳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며, 짧게 머무는 것은 그곳을 조금 흡수했다는 거겠다. 비록 그 집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학생들이 다녀갔겠지만, 나로선 첫 번째로 ‘낯선 집’그 자체였으니 그때 담았던 기억들은 아직까지 간직하고 싶은 맘 한가득이다. 그래서 한 곳에 머무는 사람은 담백하고 고즈넉하고 포근하다.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것은, 내 마음에도 그대로 있다는 것과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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