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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Dec 09. 2020

Evergreen

 영원을 의미하는 Ever와 초록을 의미하는 Green이 합쳐진 말이었다. 한자로는 푸르다는 의미의 상록, 그리고 나무 수 자가 더해져 '상록수'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그것은 어느 한 나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잎의 색이 늘 푸른 나무 모두를 일컫는 말이었다.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나무라고 생각했으며 가엾이 박혀있는 나무들은 태어난 곳에 살다가 죽는 것뿐이라 생각했다. '나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색이 초록이듯, 수많은 나무들 중 하나였을 테니까. 굳이 굳이 영원이라는 시간과 초록의 색을 더해봤을 땐 마땅히 생각나는 것이 없어 마음을 살짝 열었다가 닫아버렸지만 그건 아마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싱싱한 냄새를 맡아보지 못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그 말의 기원을 찾아본다. 17세기. 그 어느 것보다 초록을 띤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고, 영원이라는 의미는 200년이 지난 19세기가 최초였다. 무려 200년이 지난 뒤에야 시간이 멈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시간 따위에 연연하지 않는다. 시들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 어쩌다 바람이 부는 날엔 떨어지는 낙엽이 저 멀리 보이는 어느 나무의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그 나무는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이고는 다시 품게 되는 것. 그렇게 오래오래 같이 살다가 다시 떨어지면 무던하게 작별인사를 하고 또 다른 나무로 옮겨가는 것. 그 거리는 집에서 다리를 건너 바다를 건너 사람을 건너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는 것. 나는 그게 바로 영원의 초록이겠구나 싶었다. 영원은 시들지 않는 것이고, 초록은 어디에나 있는 색이므로.


 1월의 겨울, 어느 나무아래에 아이와 엄마가 서있었다. 나무를 보며 사색에 빠진 대화를 하고 있는 것 같아서 지나쳐 갈 수 있음에도 나는 그 대화를 엿들었다. 아이는 나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엄마, 이 나무는 왜 항상 초록색이야?" 아이의 물음에 색은 없었다. 맑고 순수하고 투명한 색. 어른들은 결코 얻을 수 없는 색. 순수할수록 비수를 꽂는 말. 나는 잠시 봄부터 겨울을 돌아봤다. 그러게. 가을에도 겨울에도 어떻게 멀쩡히 살아있을까. 잎은 곧 떨어지는 거겠고, 색이 노랗게 변하거나 벌겋게 변하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눈에 쌓여 희게 되었거나 할 텐데 왜 이 나무는 항상 초록일까. 나무를 슬쩍 올려다봤다. 나뭇가지가 흔들거렸다.


"글쎄, 태어난 순간에 시간이 멈춘 게 아닐까?"


 엄마의 대답엔 색이 보였다. 푸르른 초록초록. 맞는 말이었다. 나무,라고 하면 떠오르는 색은 초록. 책에 나오는 그림을 봐도 초록. 세상은 온통 초록초록. 알고 보니 계절에 상관없이 푸르다는 것은 그 낙엽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죽은 낙엽을 떨구고 새로운 낙엽이 다시 태어나 그 낙엽자리를 대신 채운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죽은 낙엽의 색은 늙고 힘없는 색이 아닌 푸르른 젊음의 색. 늙는다고 늙어가는 게 아니었고, 죽는다고 죽어가는 게 아니었다. 단지 떨어지는 시기가 다를 뿐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같았다. 그래서 여름이고 겨울이고 같은 색으로 보였을 거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시간이 멈춘 나무의 색.


 1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이 나무가 이대로 이곳에 박혀있다면, 그리고 여전히 초록이라면, 그건 세월을 피하지 못한 나와 요리조리 잘 피해 다니는 나무 사이로 어느 안부의 마음이 쓱 지나가는 것이다.

인사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에 손바닥으로 나무를 툭 치는 것. 툭 치는 힘의 량은 정말 누군가와 악수를 할 때의 힘. 바람이 불어 나무가 살짝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나는 그걸 "나는 여전히 잘 지내고 있습니다 “라고 내 맘대로 들어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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