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멈췄다. 그리고 봄을 빚었다. 그것은 어루만질수록 모양이 잡혔고 뜨겁게 달궈질수록 선명해졌다. 화덕에 굽는 시간을 겨울잠이라 부른다면, 그 긴 시간을 견디고 나왔을 땐 어느 봄의 첫날이었으며 아직 손에 묻은 점토가 굳기 전까지 봄이라고 할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느꼈던 계절, 희고 흰 겨울이 지나 봄이 온다는 건 당연한 것이었지만 봄이 오기 전의 계절이 겨울인 건 당연한 게 아니었다. 그건 어떻게 보면 어디에나 있고, 또 어떻게 보면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봄이 온다고 해서 모든 걸 녹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타카히로. 일본 규슈에서 온 사람. 긴 생머리와 지점토처럼 황해보이는 얼굴, 주름지고 투박한 손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래서 훈제계란을 떠올리게 했던 사람이었다. 나는 껍질 내부의 반들반들한 걸 보고 싶어서 별 의미 없는 말을 건네곤 했다. 어쩌다 이곳에 왔는지, 얼마동안 머물 것인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는 내 질문의 대답에 한 두 마디의 말을 하는 게 전부였다. 그 껍질이란 게 생각보다 단단했다. 사람이 말을 하면 감정이 드러나기 마련인데 그 사람은 모든 걸 무덤덤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니까 책을 들고 다니다 넘어져도 신음소리 하나 내지 않았고 맛있는 라멘을 먹을 때도 오이시이 같은 말뿐이 아니라 음 오 같은 추임새조차 내뱉지 않았다. 그에게 표정의 변화는 사치였다. 웃고 있진 않지만 그렇다고 슬퍼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그 훈제계란 껍질안에는 뭐가 들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마음을 가졌을까. 오랫동안 묵혀있던 걸 꺼내면 더 담백하거나 아니면 더 비릴 텐데. 그렇다고 함부로 깰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내가 요리사도 아닌데.
흰 눈이 소복했을 때, 커피 자판기 앞에서 대화를 나눴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여전히 나 혼자 떠드는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어쩌다가 눈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가 겨울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또 어쩌다가 그 사람이 입고 온 갈색코트가 참 어울리다고도 생각했다. 진한 갈색. 찬 바람과 어울리는 색. 나는 대뜸 그에게 추운 계절을 좋아하냐고 물었다. 별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그 사람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글쎄 봄이 제일 좋다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대답을 해줬다는 것에 놀랐고 그 대답이 살짝 요란했다는 것에 또 놀랐다. 그렇게 꽁꽁 싸매는 사람이 뭔가를 좋아한다는 건, 그건 어쩌면 엄청난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스스로 말랑해지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봄을 좋아한다니. 봄이라.
짧은 만남을 가지고 우린 각자의 나라로 돌아갔다. 그리고 찾아온 봄에 나는 어쩌면 사람도 계절을 타고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태어난 계절. 그러니까 봄, 하면 떠오르는 것이 그 계절이 아니라 그 계절을 타고난 무엇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흩날리는 꽃 향기이기도 했고 따듯한 바람이기도 했고 날아가는 꿀벌이나 새콤한 딸기기도 했다. 사소하지만 담백한 것들이었다. 쥐어짜듯 생각하려 하면 떠오르지 않고 오히려 사소한 것들 따위에 되살아나는 것들. 직접 만져봐야 와닿고, 코로 맡아야 떠오르고, 눈으로 봐야 내 안에 남는 것들. 그리고 그 사람. 타카히로가 생각났다. 봄을 좋아한다는 그 사람이 생각났다. 아. 정말 봄을 타고난 사람이었구나. 봄을 닮아서 그런지 날이 따듯해지려 하니까 노크도 안 하고 들이닥치는구나. 이런 도자기처럼 꾸덕한 사람 같으니. 자판기 앞에서 본 수줍은 마음은 이제 반들반들하게 잘 구워진 것 같다. 그럼 나는, 나는 겨울을 좋아하지만 추위를 잘 타고 눈을 싫어하지만 얼굴이 새하얀 편이니까 아무래도 봄보단 겨울이 맞겠다. 내가 좋아해서가 아니라 정말 그렇게 타고난 것 같아서.
언젠가 규슈에 가봐야겠다. 그곳의 봄을 쬐며 스스로를 어루만져봐야겠다. 겨울이 오기 전, 그곳의 봄을 간직하고 싶을 수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