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동이라는 작은 달동네에 살았다. 후미진 골목과 전봇대 밑에 쌓여있는 쓰레기냄새와 길고양이들이 먹고 남겨진 잔해들은 아무리 치워도 그곳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낮보다 밤이 더 밝아졌고, 그건 집마다 졸졸 새는 빗물 때문에 그런 것이었다. 달동네란 그렇다. 높은 곳에 있는 동네라 달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곳. 동시에 비가 내리면 가장 먼저 젖어지는 동네. 그 비는 위에서 고여 아래로 내려오면 아랫마을 사람들은 물에 잠겨버린다. 나는 어릴 적부터 그런 것들엔 관심이 없었고 그저 흘러내리는 물결에 발을 푹 담는 걸 좋아했다. 신발 옆으로 퍼져나가는 물을 보며 묘하게 뿌듯했다.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얼어버린 바닥에 넘어질까 두려워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는 것처럼 이리저리 크로스 모양으로 언덕을 내려갔고, 분식집 떡꼬치 하나 먹겠다며 트럭보다 빨리 뛰어내려오던 때가 있었는데 말이다. 그 시절이 좋았다기보다는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들이 그곳에 있으니까. 그래서 추억하는 것뿐이다.
그곳을 떠난 지 10년이 넘었지만 약국 앞에서 팔았던 군밤장수 아저씨를 잊지 못한다. 아저씨는 다리를 늘 절뚝거렸다. 언제 어떻게 다친 건지 나는 모른다. 시력도 좋지 않아 한쪽 눈에는 안대까지 하고 다녔는데 처음 본 사람은 사뭇 거리감이 드는 인상이었다. 항상 비니를 쓰고 다녔고, 구멍 난 바지는 사시사철 똑같아서 사람들은 아저씨를 바지장수라고도 불렀다. 때론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으나 그 아저씨는 늘 당차고 웃음이 많던 사람이라 군밤을 파는 순간에는 누구보다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매일 밤마다 덜덜거리는 군밤기계를 끌고 밤을 넣어 타닥타닥 타는 군밤을 만들었을 때는 그 어떤 것보다 담백한 냄새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가곤 했다.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냄새라도 맡아보자 들숨으로 크게 들이켜면 오래 간직해야겠다는 마음이 익어간다. 그땐 순간의 감정도 영원할 거라 믿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냄새가 잊혀 간다. 군밤 먹을 시기가 한참 지났음에도 이제 와서 내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건지, 아니면 그 시절의 나를 그리워하는 건지.
- 저기 아저씨, 그냥 밤보다 구운 밤이 맛있나요?
- 그렇지 뭐, 뭐든지 구우면 더 맛있어져
- 왜요?
- 금방 뜨거워지고 금방 식으니까. 그래서 군밤은 빨리 먹어야 해, 나중에 먹으면 밋밋해
그때는 별생각 없이 들었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말이다. 군밤처럼 시간이 갈수록 밋밋해져 가는 것. 그건 어쩌면 그 시절의 내 모습이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든다. 나는 아직도 그곳에 있는 것만 같은데. 애잔했던 것들과 향수병에 걸린 기억들, 사랑에 웃고 이별에 울었던 그 시절들. 아직 그것들이 식지 않았다면, 따듯함이 남아있다면 짧은 순간 이더라도 그것을 소중하게 다뤄야겠다. 시간이 지나면 뜨거웠던 것일수록 빠르게 식어갈 뿐이니까. 가끔 그 시간 속, 기억 속엔 나도 모르는 나의 모습이 그리워질 때가 있네. 이젠 웃으면서 군밤을 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