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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ungmin Jun 06. 2022

beloved


 누군가는 사랑받기를 원하면서 정작 사랑하기를 무서워한다. 누군가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 이 결국 본인을 사랑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는데, 점점 후자에 가까워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나는 사랑을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걸 좋아한다. 그 순간의 내가 좋다.


 줄곧 ‘시골’ 하면 할머니 집을 떠올렸다. 밭이나 논이 있는 촌이 아니라 우리 집과 너무 멀리 있어서 그랬던 것 같다. 버스를 타면 최소 10시간이 넘어 멀미가 있던 나에겐 힘든 시간이었다. 그래서 1년에 한두 어번, 명절에만 내려가게 되었다. 버스를 타기 전에는 늘 ‘키미테’라는 스티커를 귀밑에 붙이고 탔는데 버스에 내린 다음날까지도 나는 그걸 붙이고 다녔다. 지금은 버스 멀미, 뱃멀미는 없어지고 온전히 사람 멀미만 남았다. 그땐 저항 없이 끌려다니는 게 속이 울렁거렸지만 지금은 날 쫓아오는 게 무섭다. 내가 뒤처질까 봐. 그게 사람 멀미다.


 할머니 집 앞에는 자갈밭이 있었는데 밟을 때마다 들리는 자그락자그락 소리가 좋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맡아지는 산뜻한 풀내음과 구수한 사투리가 스며든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왜 그리 반겨주셨는데 내가 봐도 나를 많이 좋아하신 것 같았다. 식사 시간이 되면 음식을 다같이 만들었다. 어느 명절이건 늘 똑같았다. 윤기가 흐르는 잡채와 고깃덩어리들, 그리고 갓 잡은 생선구이에 소고기뭇국까지. 그중에서도 나는 뭇국을 가장 좋아했고 국물이 아니라 건더기를 많이 먹었다. 그땐 음식을 남기는 것이 잘못된 거라 배웠고 필요 이상으로 밥상에 올리는 게 잘못된 건 줄 알았다. 그래서 어느 음식이 나오든 무작정 입에 다 넣으려고 했다. 할머니는 그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내가 먹을 때마다 스윽 보더니 ‘천천히 무라, 남겨도 된다’라고 말을 하시곤 했다. 할머니는 나를 좋아했다. 음식이든 이불이든, 좋은 것들을 왜 그리 듬뿍 주신 건지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코찔찔이에 거짓말쟁이 바보였는데.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보던 날은 그랬다. 할머니 코에는 호흡기가 들어가 있었고, 옆에는 의료용 산소통이 있었다. 할머니는 숨을 가쁘게 내쉬며 나에게 물었다.


 ‘영민아 할머니 사랑하나?’


 나는 말했다.

‘… 아니요’


 대답을 들은 할머니의 표정이 생각난다. 후회했다. 그냥 말없이 웃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원한다고 다시 돌아갈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렇다. 왜 나는 그렇게 서툴렀을까. 나는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다. 매년 볼 수 있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늘 찾으러 가니까. 언제라도 만나러 가니까.


 마지막 만남 이후 며칠이 지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와 형이 보고 싶다고 했다. 우리는 곧장 부산으로 내려갔다. 나는 버스 안에서 자고 있다가 엄마가 핸드폰을 슥 열고 닫는 소리에 깼다. 엄마는 나에게 속삭이듯 할머니가 방금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라 눈을 감았다. 생전 해본 적도 없는 기도를 이 날 처음 해봤다. 조금만 더 빨리 가달라고 빌었다. 조금만 더 늦게 떠났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이뤄지지 않는 기도는 나에겐 사치였다. 같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게 맞긴 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떠 형과 아버지의 얼굴을 살폈다. 눈물을 흘리고 있는 형과 창문만 멍하니 바라보는 아버지. 그때 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할머니의 화장을 직접 봤을 때는 눈물이 나지 않았다. 딱히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다. 여기는 다시 올 곳이고 할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날 아버지의 눈물도 처음 보았다. 피도 눈물도 없을 줄 알았는데. 아버지도 사람이었다.


 할머니 집에 들어가 식탁에 멍하니 앉았다. 눈물도 나오지 않고 슬프지도 않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는 게 맞을 거다. 정말 믿기지 않았으니까. 영화 ‘데몰리션’의 한 장면 같다. 무의식적으로 믿지 않아 오히려 부정하게 되는.. 그러다 식탁 위에 놓인 종이 한 장을 보게 되었다. 할머니의 글씨체였다. 쓰여있는 글을 보고 그제야 정말 하늘이 무너지듯 울었던 것 같다.



보고십어



 아아 세상에 눈물로 만들어진 바다가 있다면, 그건 필시 내 것이 되었으리라. 숨도 쉬기 힘들어했던 할머니는 나를, 우리를 왜 그렇게 보고 싶어 했을까. 우리가 약속했던 많은 날들이 저 단어들로 무너져 버렸는데 나는 그저 사랑받기만을 원했던 사람이었을까.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지기엔 9살의 나는 너무나도 어렸다.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하염없이 우는 것뿐. 그 한 글자씩 적은 종이를 붙잡고 나는 미친 듯이 울었다. 내 슬픔이 하늘로 올라가 내가 받은 사랑을 다시 돌려주고 싶을 만큼. 그럼 할머니는 웃으며 ‘남겨도 된다’라고 말했음이 분명하겠다. 그럼 내가 받았던 사랑은 내 안 어딘가에 쭉 남아있으려나.


 받기만 하는 사랑은 내가 바라던 사랑이 아니었다. 후회를 머금고 그런 짓을 하기엔 나라는 사람은 너무 미련하고 바보 같다. 여전히 사랑받는 게 낯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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