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Always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ungmin Jul 03. 2022

길을 헤매다 마주친 것



 예전부터 늘 그래왔던 일. 길을 잃으면 시간을 보는 것. 잃어버린 시간을 외우는 것. 길을 헤매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그냥 운에 의존해 버리기. 기억에 닿을 수 있는 가장 최근의 일 중, 조금 더 행운에 가까운 방향으로 가버린다. 그러니까 길을 잃어버리기 전에 탔던 버스에서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면, 길을 잃었을 땐 그 자리에서 왼쪽으로 가보는 것이다. 더운 날, 차가운 물이 흐르는 곳엔 흐르는 쪽으로 가는 것이고, 바람이 부는 날엔 바람이 부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것이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는 마음은 그렇게 순간의 운에 의존해 버린다. 아니, 의존한다기보다 그냥 내 멋대로 정한 징크스일지도 모르겠다. 길을 헤매게 만든 방향은 정말 쭉 헤매게 만들 것만 같아서. 

 

그날은 표지판이 전부 왼쪽을 향하고 있어서 나는 반대방향인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조금 걷다 보니 어느 노부부와 강아지가 보였다. 그들은 비에 젖은 벤치에 앉아있었다. 빗방울이 송송 맺힌 벤치. 이 꾸리꾸리한 날씨와 그 둘이 묘하게 어울려 보여 계속 눈길이 갔다. 할아버지는 앉아있는 할머니의 엉덩이를 자꾸 쳐다봤다. 빗물에 젖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할머니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치매라도 걸린 건지 정말 미동이라는 게 없었다. 둘이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보니 할아버지 혼자 떠들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인지 대꾸도 없는 할머니를 보며 안쓰럽다고도 생각했다. 그래도 한 번 즈음 웃어주면 좋을 텐데,라고 괜한 오지랖을 부리려다가 할머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뭐야. 뭘 했길래 저리 좋아하는 거야. 할아버지는 살짝 너덜거리는 흑백사진을 꺼냈다. 아, 옛날사진. 젊은 남녀가 붙어있는 걸 보니 분명 젊었을 적 모습 같다.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웃자 도리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사람 마음에 심장박동기처럼 두근거리게 하는 그 사진이 궁금하기도 했다. 꾸깃한 사진 하나에 저렇게 웃는 모습이 너무 부럽기도 해서 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잔상이라고 생각했다. 크리스마스의 빛바랜 잔상. 분명 저 둘은 아주 오래전부터 사사로운 것 하나에도 웃음이 났을 거야. 그리고 분명 피가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을 거야. 차갑게 식기도 어려운 펄펄 끓을 정도의 사랑.


 갑자기 내리는 비에 하늘을 올려다봤다. 소나기였다. 그 둘은 그렇게 웃다가, 비인지 추억인지 뭔가에 살짝 젖고 우산을 펼치더니 어딘가로 떠났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고 피가 살짝 달아오른 걸 느꼈다. 내리는 빗방울은 마치 내 몸에 닿을 때 치익치익 소리를 내며 증발하는 것 같기도 했다. 함께 사는 집주인이 말한 나약함을 기억한다. 이곳에서 우산을 쓰고 다니면 나약하다고. 나는 집주인을 불러 이 모습을 보게 한 뒤, 그래도 저 사람들이 나약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만약 응 같은 말을 한다면 나는 정말 집주인 뒤통수에 스매싱을 갈겼을 것이다.


나는 멀어지는 노부부의 등 뒤로 소리쳤다.

"메리 크리스마스!"

그 둘이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그 외침을 나 스스로에게 한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헤매다 마주친 노부부를 내 맘대로 행운이라 정해버리고 나는 그들이 떠난 쪽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는 정말 이 길이 맞는 것 같다. 아니, 길을 좀 헤매면 어때. 한 번 즈음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소리 지를 수 있으면 된 거다. 정말로, 이 정도 운이면 괜찮은 거겠지. 시계도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길을 잃어버린 게 아닐 수도 있으니.


아아. 이 마을엔 오래된 전통이 하나 있다.

크리스마스에 꼭 수영을 한다. 비가 내리든 내리지 않든.


매거진의 이전글 본색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