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시절. 동네 세탁소. 컴퓨터 크리닝이라는 간판. 옛날 세탁소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컴퓨터'라는 단어는 세탁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건지 몰랐습니다. 수동으로 돌리는 세탁기를 자동화하기 시작 한 이후 생긴 단어라는데 '컴퓨터'는 그 시대에 있어 자동화 그 자체를 의미했나 봅니다. 세탁소 문을 열면 들리는 스팀 소리와 은은한 세제 냄새를 좋아했습니다. 향수 냄새보다 섬유유연제 냄새를 좋아하는 건 지금도 그렇습니다. 사람 냄새가 이런 걸까요.
주인 할아버지는 피노키오에 나오는 제페토 할아버지를 꼭 닮았습니다. 흰머리와 흰 수염이 덥수룩하고 김서린 안경에 늘 체크무늬 앞치마를 둘러 당장
에라도 목각인형을 만들 것 같았습니다. 무뚝뚝하고 표정의 변화가 없어 말 그대로 무미건조한 사람이었지만, 오로지 다림질에 집중하는 모습은 '중후하다'라는 표현이 적합해 보였습니다.
한때는 교복 바지통을 줄이는 게 유행이었고 할아버지는 꼭 부모님께 허락을 받아와야지만 수선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아 가장 친한 친구에게 부탁해 사인을 만들어 냈습니다. 종이도 일부러 꼬깃꼬깃하게 만들었습니다. 사인이 적힌 종이를 건넸을 때는 나름 당당했던 것 같은데, 그때 보았던 할아버지의 눈빛은 잊지 못합니다. 마치 늑대와 같았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걸 어찌나 잘 알던지, 친구들과 저는 늘 피노키오가 되었습니다. 일부러 속아 넘어가 주는 모습에 제페토 할아버지는 그래도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구나 싶었습니다.
어느 추운 겨울이었을까요. 눈이 펑펑 내린 다음 날, 오래된 패딩을 드라이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뽀드득거리는 눈을 밟을 땐 세탁소가 멀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앞으로 걷다가 뒤를 돌아 쌓여있는 눈을 보고는 다시 앞을 보고 걷습니다. 이만 치도 눈을 좋아했던 것이에요. 세탁소 앞에 도착했을 땐 빗자루로 눈을 쓸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습니다. 인사를 하려다 할아버지의 이상한 목도리를 보고 그만 실례를 범했습니다. 그 목도리는 어디서 구한 것이냐고 물어봤습니다. 그 질문은 목도리가 비싸 보인다거나, 내 것이랑 똑같아 보였다거나, 할아버지와 어울리지 않았다거나 하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연분홍색에 삐죽삐죽 튀어나온 보풀에 호기심이 생겼을 뿐입니다. 할아버지가 수선했다면 저렇게 꼬질스럽지 않았을 테니까요. 할아버지는 빗자루를 몇 번 쓸더니, 대답을 합니다. 이거 받은 거야. 네? 누구한테요? 누구긴 누구야 집사람이지. 집사람이 좋아해 이걸.
집사람이 좋아한다는 말에 잠시 스쳤던 기억. 세탁소는 할아버지 혼자서 운영한 게 아니었다는 것. 세탁소 안쪽에 작은방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 안에 할머니가 늘 계셨다는 것과 가끔 문을 열고 할아버지가 다림질하는 모습을 보곤 했다는 것. 이름을 부르지 않고 늘 돌아보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았으나, 할아버지는 기필코 뒤를 돌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나는 사사로운 마음이 들어 할아버지의 얼굴을 봤다가 할머니를 보고 다시 할아버지의 얼굴을 봤지만 도대체가 아무런 감정이 없어 보였습니다. 할머니 혼자 짝사랑하는 건가 싶어 마음이 시렸습니다만, 지금 생각해 보면 말이죠. 본인의 업이 있음에도 그 꼬질꼬질한 목도리를 늘 매고 있었다는 것은 말입니다. 그저 뒤에서 바라보는 걸 좋아하고 얼른 돌아보기를 기다리는 것은 말입니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은 무엇일까요. 사랑하고는 거리가 멀어 보이던 사람이 몇 시가 되었건 식사는 항상 방 안에서 같이 먹고, 달력 옆에는 젊었을 적 집 사람과 같이 찍은 사진을 걸어두고, 늦은 밤 혹여나 잠에서 깰까 작은 등 하나만 켜 두는 것이라면요. 그게 사랑이 아니라면 사랑은 없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사랑에 온도가 있다면 그 온도는 세탁소 안의 모든 걸 다리기에 충분하지 않았을까요.
지고지순이라 하나요. 지고란 '무엇보다 높음'이라는 의미이고, 지순이란 '무엇보다 순함'이라는 의미이고, 지고지순이란 '더할 나위 없이 높고 순수함'을 의미합니다. 눈이 내리는 곳이 지고라면, 그 눈에 있는 결정체는 지순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은 결국 고귀하고 순수한 사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분명 이런 사랑을 했을 거라는 생각에 순애보란 참 아름다운 것이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세탁소를 나와 눈을 다시 밟아봤습니다. 뽀드득 소리가 납니다. 신발이 조금 깨끗해진 것도 같습니다. 이건 아마 제 마음도 세탁을 하고 다림질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간지러운 착각을 해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