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둘기
성인이 되었을 때였나.
초등학생 시절, 자주 가던 분식집이 그리워졌어.
모교는 그립지 않았지만, 그 앞 골목과 떡볶이 냄새는 아직 마음 한쪽에서 따뜻하게 숨 쉬고 있었거든.
그런데 오랜만에 보는 분식집 아주머니 얼굴엔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어. 그 시선 끝에는 골목 아이들이 있었고, 뒤집힌 박스 위엔 바람을 막는 커다란 돌이 놓여 있었지. 그때, 작은 흰 트럭이 골목 안으로 스며들었어.
아주머니 목소리가 커졌고, 주변 가게 주인들도 함께 외쳤어.
“멈춰요! 아저씨, 멈춰요!”
그러나 흰 트럭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앞으로 나아갔지.
펑-!
골목이 숨을 멈췄어.
트럭은 그대로 사라졌고, 허공에는 회색 비둘기 깃털이 잿가루처럼 공중을 더듬으며 날아다녔어. 그 자리에 생명의 붉은 선이 일직선으로 곧게 그어져 있었지.
꿈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들의 고함을 뒤로한 채, 감탄과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어.
그건 정말 감탄할 일이었을까. 그건 정말 웃을 일이었을까.
*
아파트 공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어. 여자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있었거든. 그래서 물었지.
“뭘 잡는 거니?”
“비둘기 잡아요.”
비둘기를 잠자리채로 잡는다니, 이상하더라.
“잡아서 뭐 하려고?”
아이의 대답은 단호했어.
“죽이려고요.”
*
어른들은 말하지.
어려서 그렇다, 아직 잘 몰라서 그렇다.
그러고는 조용히 덮어버리지.
그게 정말 보호였을까.
무지는 권리일까, 죄일까.
사람은 배우면서 살아가. 모를 수 있어. 그런데 누군가 알려줄 때, 대답은 ‘감사합니다’ 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맞춤법을 고쳐주면 ‘꼰대’라고 부르지. 그래서 교권이 무너진 건 아닐까.
모를 수 있어. 하지만 배움을 거부하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젖을 떼지 못한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아.
어릴 적 개미를 죽이던 나, 비둘기를 죽이려던 아이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도덕이었을까, 양심이었을까, 아니면 감정이었을까.
아마 다였을지도 몰라. 그때의 나는 잘 몰랐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그 사람의 마음속 그림자를 함께 걸어주는 일이라는 걸.
*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외로움이 나를 찢어놓았지만, 동시에 나를 붙잡아 준 것도 외로움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던걸, 지금의 내가 너에게 말해줄 수 있어.
너는 계속 걸어가야 해. 밟아온 길이 거칠고 괴로웠겠지만, 그 위로 걸은 네 발은 점점 더 단단해질 거야.
때로는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기억이 섬뜩하게 발을 찌르겠지만, 그것마저도 네 발자국 안에서 반짝이는 빛이 될 거야.
부끄러워도 괜찮아. 아팠어도 괜찮아. 그 모든 날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까.
우리는 외로워서 갈라지고,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섰어. 그리고 그건, 결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