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의 서막, 그리고 외로움의 시작 (2)

비둘기

by 슈리엘 아샬라크

성인이 되었을 때였나.

초등학생 시절, 자주 가던 분식집이 그리워졌어.

모교는 그립지 않았지만, 그 앞 골목과 떡볶이 냄새는 아직 마음 한쪽에서 따뜻하게 숨 쉬고 있었거든.


그런데 오랜만에 보는 분식집 아주머니 얼굴엔 먹구름이 드리워 있었어. 그 시선 끝에는 골목 아이들이 있었고, 뒤집힌 박스 위엔 바람을 막는 커다란 돌이 놓여 있었지. 그때, 작은 흰 트럭이 골목 안으로 스며들었어.


아주머니 목소리가 커졌고, 주변 가게 주인들도 함께 외쳤어.


“멈춰요! 아저씨, 멈춰요!”


그러나 흰 트럭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듯 앞으로 나아갔지.


펑-!


골목이 숨을 멈췄어.

트럭은 그대로 사라졌고, 허공에는 회색 비둘기 깃털이 잿가루처럼 공중을 더듬으며 날아다녔어. 그 자리에 생명의 붉은 선이 일직선으로 곧게 그어져 있었지.


꿈인 줄 알았어. 그런데 아이들은 어른들의 고함을 뒤로한 채, 감탄과 웃음을 남기고 사라졌어.


그건 정말 감탄할 일이었을까. 그건 정말 웃을 일이었을까.


*


아파트 공원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봤어. 여자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있었거든. 그래서 물었지.


“뭘 잡는 거니?”


“비둘기 잡아요.”


비둘기를 잠자리채로 잡는다니, 이상하더라.


“잡아서 뭐 하려고?”


아이의 대답은 단호했어.


“죽이려고요.”


*


어른들은 말하지.

어려서 그렇다, 아직 잘 몰라서 그렇다.

그러고는 조용히 덮어버리지.


그게 정말 보호였을까.

무지는 권리일까, 죄일까.


사람은 배우면서 살아가. 모를 수 있어. 그런데 누군가 알려줄 때, 대답은 ‘감사합니다’ 여야 하지 않을까.


요즘은 맞춤법을 고쳐주면 ‘꼰대’라고 부르지. 그래서 교권이 무너진 건 아닐까.


모를 수 있어. 하지만 배움을 거부하는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젖을 떼지 못한 어린아이와 다르지 않아.


어릴 적 개미를 죽이던 나, 비둘기를 죽이려던 아이들.

우리가 잃어버린 건 도덕이었을까, 양심이었을까, 아니면 감정이었을까.


아마 다였을지도 몰라. 그때의 나는 잘 몰랐어.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게, 그 사람의 마음속 그림자를 함께 걸어주는 일이라는 걸.


*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 외로움이 나를 찢어놓았지만, 동시에 나를 붙잡아 준 것도 외로움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던걸, 지금의 내가 너에게 말해줄 수 있어.


너는 계속 걸어가야 해. 밟아온 길이 거칠고 괴로웠겠지만, 그 위로 걸은 네 발은 점점 더 단단해질 거야.

때로는 유리 조각처럼 날카로운 기억이 섬뜩하게 발을 찌르겠지만, 그것마저도 네 발자국 안에서 반짝이는 빛이 될 거야.


부끄러워도 괜찮아. 아팠어도 괜찮아. 그 모든 날이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되었으니까.


우리는 외로워서 갈라지고, 무너졌지만, 다시 일어섰어. 그리고 그건, 결코 부끄러운 역사가 아니야.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