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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한 시아는 취업에 관한 한 점의 생각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방 깊숙한 곳에 스스로를 파묻은 채 살아가는 듯했다. 방 안을 들여다보면 마치 생크림처럼 침대 위에 흐물흐물 얹혀 있는 모습이나, 컴퓨터 앞에서 키보드 타건 소리가 잔잔한 전쟁의 리듬처럼 울려 퍼지는 장면이 목격되곤 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아가 즐기는 게임의 배경은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다웠고 음악은 화려하면서도 청아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저 애는 혹시, 저런 화려한 세계 속에서 살고 싶은 걸까?”
시아가 현실을 피하고 그 이상향 속으로 자꾸 도피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물음은 내 안에서 끝없이 맴돌았다. 내 마음 한편에서는, 혹시 그곳이 시아에게 유일한 탈출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서서히 피어올랐다.
시간은 그렇게 흘렀고, 어느새 나는 남자아이를 낳았다. 이 아이에게 ‘주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세상에서 내 아이가 제일 예쁘다는 말이 있듯, 나 역시 주호에게는 그 무엇보다 큰 애정을 느꼈다. 그러나 주호가 태어난 후, 나는 점점 시아와 함께 사는 것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음침한 시아와 우리 주호가 함께 자라난다면, 이 순수한 아이마저 어둠에 삼켜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내 마음을 서서히 잠식해 갔다. 시아는 항상 주호 가까이 다가가기보다는 문 하나를 두고 관찰하다가, 내가 다가가면 도망치듯 멀어지고는 했다.
이제 내 세계의 중심은 오로지 우리 주호였다. 남편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 부부의 모든 새로운 관심사는 갓난아기 주호에게로 옮겨갔고, 시아는 점점 외면의 대상이 되어갔다.
친정엄마가 오기 전 남편의 서재를 정리했다. 그곳 서랍 깊숙한 곳에서 먼지가 낀 낡은 휴대폰 하나가 굴러 나왔다. 어쩌면 그 안에, 그의 과거와 감춰진 기억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호기심에, 나는 즉시 충전기에 연결했다. 어린아이가 처음으로 잘못을 몰래 저지를 때처럼, 가슴이 마구 뛰었다. 휴대폰이 켜지자, 갤러리 속 동영상 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오래된 파일 하나를 눌렀다.
화면에는 어린 시아가 꽃으로 엮은 화관을 손에 들고 있었다. 남편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가 작게 들려왔다.
“그 화관 들고 가서 엄마한테 줘 봐. 오늘 엄마 기분 좋다.”
어린 시아의 눈빛은 약간의 두려움과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화내면 어떡하지?”
남편은 옆에서 따뜻하게 타일렀다.
“아니야, 괜찮아. 아빠가 아까 엄마랑 이야기도 했어.”
“정말?”
남편이 어딘가를 향해 손짓했다. 아이는 몸을 꼬면서 조금 고민하는 듯하더니 달렸다. 어린아이의 낙엽처럼 작은 손이 한 여인에게 엉성하게 엮은 화관을 건넸다.
“이건 엄마 거.”
화관을 건네는 그 순간, 아이의 손은 떨림과 함께 미묘한 결심을 드러냈다. 도시락에 집었던 김밥을 내려놓은 여자는 아이를 품에 파묻듯이 안고 칭찬을 샘물처럼 쏟아냈다.
“역시 딸이 최고야. 어떻게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아아, 귀엽기는 또 얼마나 귀여운지!”
모든 것이 한 편의 아름다운 동화처럼 느껴졌다. 나는 잠시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날의 다정한 목소리와, 최근의 냉담한 남편의 모습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시아가 아직 어렸을 때의 영상에는 따스했던 웃음소리와, 남편이 보여주는 부드러운 태도가 들어있었다. 지금 차가운 현실과는 극명하게 대비되는 따뜻한 순간이었다. 이 영상 속에 퍼지고 있는 웃음은,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시간을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 안에서 잊혀 있던 감정들이 뭉클하게 피어올랐다. 그때의 따스함, 그때의 웃음… 지금의 그는 어디로 갔을까? 그 따스했던 순간들이, 지금의 그 차가운 태도의 근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내 마음은 다시 한번 뒤틀렸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짧은 동영상이 끝나는 것을 지켜보았다.
핸드폰 화면을 움직이며 비교적 최신 동영상으로 넘어갔다. 화면에 비친 게임기를 보자 나도 모르게 재생 버튼을 눌렀다. 시아와 남편과 그 전처가 나란히 앉아 게임을 했다. 자동차 경주의 치열한 싸움 끝에 승리는 시아의 친엄마 편을 들어주었고, 곧 승리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시아 엄마가 말했다.
“살아가는 것도 게임 같으면 얼마나 좋을까? 게임도 결국 인간이 원해서 만든 세상이잖아. 나는 게임 속에 살고 싶어.”
그렇게 말하며 웃는 시아 엄마와 시아의 웃는 얼굴이 겹쳤다. 나는 소름 끼치게 닮은 두 여자를 보았다. 시아가 게임을 즐기기 시작한 건 어쩌면, 이 말 한마디 때문이 아니었을까? 게임 속에서 언젠가 엄마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아는 그날의 말을 몇 번이나 되뇌었을까. ‘나는 게임 속에 살고 싶어’라는 그 말이, 현실을 떠나는 주문이 된 건 아닐까?
나는 마지막으로 가장 최근의 동영상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재생시키자마자 남편의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분이 나쁜 상태이긴 하지만, 우리 시아라면 괜찮을 거야. 무려 전교 일 등을 한 거잖아? 우리 딸 진짜 대단하니까 괜찮아. 엄마한테 가보자.”
시아가 종이 한 장을 들고 불안한 얼굴로 머뭇거리는 모습이 보였다. 교복을 입고 있는 시아였다. 시아는 굳은 얼굴로 결심을 드러내고는 뒤돌아 한 방문을 살짝 열고 그 사이로 스며들듯 사라졌다. 그 뒤로 남편의 카메라가 따라 들어갔다.
“엄마.”
그러나 잠들어있는 시아 엄마에게서는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깊이 낮잠이라도 자는 건가 했지만 두 눈은 멀쩡히 뜨고 있었다. 멍한 두 눈동자에서는 어떤 것도 비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눈을 보고도 섬뜩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건지, 시아는 무릎을 꿇고 똑바로 그 눈을 직시하여 약간의 희망을 품은 들뜬 목소리로 제 엄마에게 말을 붙였다.
“엄마, 있잖아. 나 전교 1등 했……”
짜악-!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가 뭘 본 거지? 가슴이 뛰었다. 엄마의 칭찬과 함께 기분이 풀려주길 바랐던 시아가, 맞았다. 시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남편의 당황한 듯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여보!”
이와 동시에 영상이 끝났다. 시아가 그토록 방 안에 자신을 가두려 했던 이유가, 마치 이 장면 하나로 설명되는 것 같았다. 시아는 게임 세계로 도망친 것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그 세계로 이주한 것이었다. 나는 화면을 덮고 싶었다. 보지 말아야 할 진실을 본 것 같아서. 하지만 덮을 수 없었다.
살짝 열려 있던 방문 틈 사이로, 시아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말없이. 나를 보며, 또 보지 않는 눈으로.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폰을 떨어뜨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그저 말없이, 고저 없이. 시아의 눈동자는 떨어진 폰을 향해 있었지만 실제로는 다른 것을 보는 듯한 느낌에 나는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입을 열어 시아를 불렀다.
“시아야.”
당연한 말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너, 꿈꾸고 있니?”
시아의 눈가가 한순간 보석처럼 반짝이는 걸 본 나였지만 거기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시아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시아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계속 온 방 안을 헤집고 다니게 놔둘 수 없었다. 저번에 겪은 바대로, 시아에게는 엄마로서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어쩐지 그때 시아가 얌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시아에게 진짜 엄마가 되기라도 한 듯 달래 보기로 했다.
“시아야, 엄마랑 같이 방으로 들어갈까?”
내 목소리가 귀에 닿지 않는 듯했다. 흐느적거리면서 내게로 걸어오기는 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면서도, 마치 날 향해 오는 게 아니라 어떤 미션을 수행하듯 걸어왔다. 시야에는 나조차 없다는 듯, 그저 하나의 기계적인 타깃처럼. 나는 조금 안도하면서 시아의 손을 잡으려 했으나, 손이 닿기도 전에 시아의 행동이 더 빨랐다. 시아의 손은 내 손을 잡은 것이 아니라,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그 손을 저지하려 내 손도 바르작거리며 애썼지만, 젊은 시아의 힘을, 발악을, 나는 이겨낼 수 없었다. 오히려 나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간신히 끅, 컥, 하고 터져 나올 뿐이었다. 이 애는 지금 현실을 게임으로 재구성한 것은 아닐까? 감정도, 관계도, 나조차도. 시아의 가느다랗고 하얀 목에서 흘러나온 어떤 맑고 청아한 목소리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 애가 목소리를 냈다.
“유저 시아, 공격 개시. 목표를 제거합니다.”
처음 듣는 시아의 목소리와 나의 목을 조르는 강한 힘과 멍하게 초점이 없는 눈동자를 보고 나는 어쩐지 더욱 힘을 쓸 수 없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슬퍼 보였다. 괴로워서인지, 시아의 이 모습이 슬퍼 보여서인지는 모르겠으나 내 눈에서는 눈물 한 방울이 넘쳐흘렀다. 나는 조금 전까지 시아를 안아주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애의 손아귀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런데 더 도망치고 싶은 건, 내가 만든 이 현실이었다. 그 순간의 따뜻함은 허상이었던 걸까? 시아의 손이 내 목을 조르고 있지만, 나는 그저……, 그 눈동자에 갇힌 고독이 더 두려웠다. 지금, 이 애는 어떤 꿈을 꾸는 중인 걸까?
나의 정신이 조금 아득해졌다. 이대로 죽는 건 아닐까, 내가 죽어버리면 우리 주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내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무언가 힘이 솟아올랐다. 이대로 죽을 수 없어, 내 손이 내 목을 조르던 손을 확, 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