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이지만, 완벽하진 않은.
나는 30대 중반이지만, 구력은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테니스 동호인이다. 중학교부터 부모님 권유로 테니스를 배워서 대학교 재학 시절에는 전국 동호인 대회에도 꽤 참가했고, 전국대회 신인부 우승도 1회 했으니 나이에 비해서는 테니스 동호인으로서는 잔뼈가 굵은 셈이다.
한국에서는 테니스 실력을 보통 구력이나 대회 입상 경력으로 얘기한다. 혹은 초/중/고 선수 경력이 있으면 "선출"(선수 출신) 혹은 "(선수) 물 먹은 적 있다"라고 한다. 구력과 실력은 일반적으로 비례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이 올라가면 구력만으로는 실력이 올라가지 않는다. 이때부터는 전국구와 입상자로 실력이 나눠진다.
"전국구"는 보통 전국 동호인 대회를 자주 다녀서 어느 정도 알려진 사람이다. 입상자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열심히 나가는데 이름이 알려진 사람일 수도 있다. 전국구는 일단 웬만한 "동네 고수"보다는 한수 위다. 평범한 테니스 클럽에서 전국구로 알려진 사람은 거의 해당 클럽에서 일인자나 최고수 반열에 올라간다. 보통 이 정도 전국구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일반 (평범한 실력의, 규모가 큰) 클럽과 잘 치는 사람들, 즉 전국구들만 따로 모여서 치는 클럽에 동시에 몸담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국구 다음에는 "전국대회 입상자" 혹은 "우승자"로 나눠진다. 입상자는 전국 대회에서 8강, 4강, 결승 등에 갈 수 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우승자는 말 그대로 한 번이라도 우승을 해본 사람들이다. (여성부에는 이를 "국화부"라고 해서 일반 여성 동호인들 사회에서는 선망의 대상이 된다. 비 우승자는 "개나리"라고 한다. 참고로 필자의 모친도 국화 부이다) 조금 더 올라가면 우승자도 "왕중왕부 우승자, " "베테랑부 우승자, " 혹은 "지도자부 우승자"로 세부화 될 수 있다.
재밌는 점은 "선출"의 위치인데, 원칙적으로는 아마추어 대회에서 선수 출신이 뛸 수 없지만, 일정 나이가 되면 뛸 수 있다든지 혹은 파트너를 일정 수준 이하로 짝짓는다든지 하면 된다는 예외 규정이 있긴 한데, 이러한 예외 규정이 항상 지켜지진 않는다. 그래서 동호인 대회의 최고 자격은 "선수 기록이 없는 선출"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면 미국은 어떨까?
나는 위에서 언급한 "전국대회 우승자"로 대우받았다. 신인부(즉, 우승 경력이 없는 사람들끼리 치르는 대회)이지만, 그래도 우승 경력으로 쳐준다. 신인부 우승을 대학교 3학년이던 2009년에 했고, 미국에 와서 유학을 마치고 본격적으로 테니스를 친 것은 2015년 정도였으니, 6년 정도의 갭이 있는 셈이다. 미국에서는 일반적으로 NTRP rating을 실력의 척도로 삼는다.
나는 초반에는 4.0으로 시작했다. 그런데 솔직히 4.0 리그에서는 거의 진적이 없다. 그러다가 USTA(미국 테니스협회)에서 진행하는 리그에 참가하다 보니, 어느새 4.5로 승급이 되어있었다. 참고로 미국 USTA rating은 1년마다 한 번씩 그동안의 경기 기록을 고려해서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특정 선수의 NTRP등급을 상향/하향 조정한다.
4.5로 USTA리그를 한 지는 한 2년 정도 되었다. 현재는 지역(알링턴) 리그 A그룹(4.5+)에 속해 있고, USTA는 두 개의 4.5팀에 속해 있다. 확실히 4.5와 4.0은 큰 차이가 있다. 한국으로의 예를 들자면, 4.0은 동네에서 20년 정도 구력을 가진 "지역 고수" 혹은 이제 막 전국 대회의 문들 두들기기 시작한 수준이라면, 4.5은 동네에서는 대항할 사람이 별로 없고 전국 대회에서 밥먹듯이 입상하는 수준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재밌는 점은 4.5에서도 그 격차가 꽤 크다는 것이다. 사실 정확히 보면 4.5라는 건 실력이 4.5~4.99에 해당한다는 의미로 그 안에서도 편차가 있을 수밖에 없다. 도입부에 올린 차트에 보면 "ATP 랭킹 400위권에 드는 월드 클래스 선수가 61세 이상이 되는 경우"(올해 61세인 존 맥켄로를 떠올려보라), "미국 대학 테니스 Division I에서 선수 생활을 한 경우이며 51세가 넘은 경우", "Division 2-3에서 뛰는 대학 선수"는 모두 4.5로 측정할 수 있다.
실제로 4.5 리그를 뛰다 보면 4.0 같이 느껴지는 사람부터 선출이 확실한 5.0처럼 보이는 사람들도 가끔 보인다. 사실 상급 4.5부터 5.0은 동호인과 선출의 경계가 무너지는 곳이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굳이 프로를 꿈꾸지 않더라도 스포츠를 전문적으로 배우고 훈련하는 경우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어렸을 때는 이것저것 다 시켜보고,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하나만 골라서 집중하다가 정말 잘하면 프로로 전향하는 것이 조금 더 일반 된 과정이다. 그러다 보니 4.5에서 뛰다 보면 "산전수전 다 겪은 50대의 고수" 뿐만 아니라 "얼굴에 솜털이 다 가시지 않은 20대 초반의 대학 선수"까지 만날 수가 있다.
그러나 이런 합리적으로 보이는 시스템에도 단점이 있다. 바로 일명 "sandbagger"라고 불리는 부정 선수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실제 실력보다 일부로 한 단계 낮은 레벨에서 뛰는 선수를 말한다. 물론 나처럼 등급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 처음에 입문할 때 레벨을 잘못 선택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것보다 의도적으로 자신의 등급을 속이는 경우를 sandbagger라고 한다.
이들은 자신의 경기 기록이 너무 좋아져서 상향될 경우, 이를 Appeal(항의)해서 등급을 낮추거나 일부로 경기를 지거나 게임을 잃는 등의 행동을 반복해서 자신이 원하는 등급에 머무르려고 노력한다. 4.5 등급에는 이러한 sandbagger가 많은데, 그 주된 이유는 5.0 리그가 얼마 없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미국 테니스 동호인 중에 5.0은 전체의 0.87%라고 한다. 즉, 상위 1% 미만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 이들만을 위한 리그나 토너먼트가 별로 없을 수밖에 없다.
반면, 4.5는 전체의 5.97%로 그나마 좀 낫다. 그 밑의 4.0은 21.41%로 확 올라간다. 그러다 보니 실제 실력은 5.0인데 4.5로 낮춰서 뛰는 선수도 많고, 반면 4.5인데 4.0으로 낮춰서 뛰는 선수도 꽤 많다. 이러한 sandbagger는 USTA의 골칫거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느 지역 USTA는 이러한 부정선수를 발견할 경우, 5.5로 등급을 올려버리는 처벌(?)을 내리기도 한다. 5.5 리그는 사실상 없기 때문에, 이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이다.
어쨌든 이런 부정선수로 인한 단점도 있지만, 미국에서의 NTRP 제도는 나름 꽤 정확하기 때문에 테니스 실력을 비교적 객관화할 수 있는 편리한 제도인 것 같다. 미국의 장점은 비교적 초·중급자들을 위한 대회가 많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2.5나 3.0, 3.5를 위한 리그와 전국 대회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실력에 맞춰서 리그를 뛸 수 있다는 점이 좋다. 반면, 한국의 전국 대회는 아무리 신인부라 하더라도 최소 4.0 정도는 되어야 대회를 즐길 수 있는(즉, 예선 탈락을 하지 않는) 점에서 대회의 진입장벽이 높다는 것이 한계이다.
끝으로, 본인이 얼마 전에 미국 리그전 경기 동영상을 공유하려 한다. 이 중에는 4.5와 5.0이 페어가 된 동영상도 있으니 5.0과 4.5의 차이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5.0+4.5 vs. 5.0+4.5 (필자는 흰색 티셔츠)
4.5+4.5 vs. 4.5+4.5 (필자는 파란색 티셔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