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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균 미국변호사 Jul 06. 2019

나의 학창 시절과 대학 입시에 대한 회상

하마터면 성공할 뻔

요새 운동을 하면서 유튜브에 있는 EBS 다큐멘터리를 가끔 보는 편인데, 최근에는 "공부의 배신"이란 제목의 다큐시리즈를 보게 되었다. 특히 중3 혹은 고3 학생들이 자사고, 혹은 대학 입시를 위해서 고군분투하는 내용의 다큐가 인상 깊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의 학창 시절 공부하던 것과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시절이 생각나서 그 시절을 회상해 봤다.


초등학교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초등학교 시절에는 나름 공부 잘한다는 소리를 듣곤 했었다. 한 번이지만 모든 과목에서 "수"를 맞기도 했었고, 성적표에 "미"이하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생각해보면 참 힘들었던 것이 매일 일기를 쓰고 담임 선생님한테 검사를 받는 것이었는데, 지금 와서 보면 성인이 되어서, 혹은 직업적으로 글쓰기를 하는데 기본을 다질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특히 기억나는 것은 6학년 때 담임 선생님이 매일 특정 주제를 주고 A4용지 한 장 분량의 글을 쓰도록 했는데, 당시에는 쓸 내용이 없어서 참 막막하다가 졸업할 때쯤 되어서는 어떤 주제든지 꾸역꾸역 분량을 채우는 방법을 터득하게 됐다. 사고의 '유창성'이 좋아졌다고나 할까?


중학교 시절

이 때도 나름 괜찮은 성적을 유지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반에서 5~10등 사이를 왔다 갔다 했는데, 딱히 평소에 공부를 열심히 하기보단, 시험 기간만 되면 2주 정도 바짝 벼락치기해서 그럭저럭 먹고사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당시에는 디아블로와 스타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거의 밤새 게임하고 수업시간에는 자는 패턴이 계속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시험시간에는 게임을 접고, 노트 필기한 내용을 통째로 외우는 거으로 괜찮은 성적을 받았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름 청주 지역에서 명문고라고 알려진 세광고에 진학했다. 정확한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름 서울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라서 나도 거기에 끼여서 공부하면 소기의 성과를 얻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는 잘됐던 것 같다. 실제로 자극을 많이 받아서 열심히 공부한 편이기 때문이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1학년 입학 후 처음 본시험에서 최초로 반에서 15등 이상의 등수를 받아본 것이다. 아무래도 공부 좀 하고, 관심 있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다 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리고 입학 시작부터 수학을 따라가기 힘들어했다. 당시에도 선행 학습이 거의 당연히 여겨지던 시절인데, 나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입학 전에 3주간 미국 여행 겸 연수(물론 이 경험이 추후 내 인생을 바꿔놓긴 했다)를 다녀오느라 수학 선행학습을 전혀 못해서 그런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수포자가 되었다. 그래도 반대로 영어는 기본적으로 관심이 있었고, 좋아해서 그런지 딱히 과외나 공부를 안 해도 상위권을 유지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상위권 아이들이나 공부하는 토익, 텝스는 꿈도 못 꿨고 그냥 내신 수준에서 나는 영어 시험을 잘 보는 정도였다.


수능 공부

사실 그냥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그냥 아침 7시쯤 등교해서 자습하고, 밤 11시까지 야자 하고, 가끔 학원 가서 2시까지 특강 듣기도 했었는데 그때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했던 기억이 있다. 주말도 하루 종일 학교에서 자습하고, 일요일은 한 달에 하루만 쉬었었다. 과외는 수학 과외를 의대생한테 받곤 했는데, 딱히 도움이 된 기억은 모르겠다. 그래도 고교시절 내내 수포자였는데 수능 때 2등급을 받은 걸 보면 나름 효과는 있었던 것 같다. (당시엔 문과도 미적분과 통계를 필수적으로 배우던 시절)


수능 성적 & 입시, 그리고 재수

수능은 총 2번을 봤다. 고3 시절(2003 수능)과 재수(2004 수능). 그나마 가장 자랑할만한 성과는 03 수능에서 외국어를 만점 받은 일. 전교에서 문과에선 나 외에 1명, 전국적으로는 문과에서 외국어 만점자가 0.5%였다고 한다. 당시 영어를 담당하셨던 담임 선생님이 참 자랑스러워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사실 딱히 영어 과외를 받지도 않았고, 영어 공부에 남들보다 시간을 많이 투자하진 않았는데 그냥 영어를 즐기고 좋아해서 잘 나왔던 것 같다. 03 수능 영역별 등급은 언/수/사/과/외가 각각 2,2,1,2,1로 평균 1.6등급이고, 종합 등급은 턱걸이로 1등급이었다. 변환 표준점수로 총점 354점. 종합 점수로 간신히 인문계 전국 상위 4%(1등급)에 턱걸이 했었다.


외국어 영역 만점을 받아서 의기양양해진 나는 고3 담임선생님이 추천해준 고대 문과/서강대 인문/숭실대 영교를 거부하고 소신지원으로 고대 영교/서울교대/홍대 영교를 써서 당당히 전부 탈락하고 재수 학원으로 직행했다. ㅋㅋㅋ 아마 이때가 당시 인생 최대의 고비라고 느꼈던 것 같다. 당시에 얼마나 멘털이 나갔는지, 테니스 레슨 받다가 홧김에 라켓도 부러뜨리고 그러던 때였다.


이후 마음을 다잡고, 재수학원에 풀타임 등록해서 심기일전을 했다. 사실 이때 인생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던 시기이고, 추후에 대학에 입학해서도 더 열심히 생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시간이었던 것 같다. 재수를 하면서는 "어차피 긴 인생 1년 정도는 돌아가도 괜찮아"라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막상 대학을 가서는 "남들보다 1년 늦게 왔으니 그만큼 더 열심히 달려서 쫓아가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다.


재수해서 본 2004 수능 결과는 03 수능 결과와 그다지 차이가 없었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더 안 좋아졌다고 볼 수도 있었다. 일단 그토록 자신 있었던 외국어 만점을 못 받고, 오히려 점수가 떨어졌다. (그래도 1등급이긴 했지만) 영역별 등급은 언수사과외가 1,2,3,1,1로 기막히게 현역 시절과 평균 등급은 1.6으로 똑같았다. 변환 표준점수도 딱 1점 오른 355점. 이때는 웃기게도 문과인데, 쓸데 없이 과학을 제일 잘봤다. (상위 1%)


그동안의 피 같은 노력이 겨우 변환 표준점수 1점의 차이라고 생각하니 허무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받아들이게 됐던 것 같다. 그래서 오히려 눈을 크게 낮추고, 인서울보단 그냥 집에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까운 지방대를 선택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어차피 영어교사가 될 텐데 굳이 비싼 돈 내고 멀리 사립대로 갈 필요는 없다는 생각도 했었다. 결국 충북대/인하대(나군)/인하대(다군)를 지원했고, 결국 세 군데 모두 수석에 가까운 성적으로 합격했었다. (이 부분은 정확하지 않지만 인하대에서 전액 장학금을 제시받았고, 충대에서는 인문계 3등 입학이라는 소리를 들었으니 거의 맞을 거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03 입시를 실패해고, 집 근처에 있는 충북대를 갔던 것이 신의 한 수였다고 생각된다. 당시 담임 선생님의 추천을 받아들여서 인서울 대학교를 갔거나 혹은 내가 소신 지원한 학교에 입학을 했다면 현재의 내 모습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에 관해서는 언제가 다음에 대학 생활에 대해서 쓸 때 다뤄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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