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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쉬타카 Dec 24. 2020

95. 커피의 저주 혹은 마법

비장의 카드 한 장은 남겨두고 파

내게는 오래된 저주들이 있다. 나와 회사 생활을 같이 했던 이들은 잘 알고 있을 정도로 한 동안 내 삶 전체에 드리워져 있었던 어둠의 저주다. 그냥 운이 없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반복적이고, 피해 가려 애써봐도 도망칠 수 없는 강력한 흑마법.


점심시간 다 같이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키면 꼭 내가 시킨 메뉴가 제일 늦게 나왔다. 처음에는 당연히 그냥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같이 점심을 먹는 동료들이 느낄 정도로 잦아졌고, 나도 조금씩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먹고 싶은 점심을 먹는 것보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것이 어느 순간 목표가 되었고, 그렇다 보니 원하는 메뉴보다는 늦게 나올 확률이 낮은 메뉴를 골라 시켰다. 하지만 이마저도 소용이 없었다. 그 가게의 대표 메뉴를 시켰으나 내 것만 늦게 나오기 일쑤였고, 그래서 나는 다른 방안을 모색하게 됐다. 가장 많은 인원이 시키는 동일한 메뉴를 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제육볶음 4개라면 나도 여기에 슬쩍 발을 들여서 제육볶음 5개를 주문하는 것인데, 이거면 확실히 벗어날 수 있겠다 싶었으나 놀랍게도 결과는 그대로였다. 제육볶음 5개를 시켰는데도 4개만 먼저 나온 것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동료들은 내가 안쓰러웠는지 동일한 메뉴 중 1~2개가 늦게 나오면 내게 먼저 양보했는데, 나도 오기가 있어서 온전히 식사가 다 나올 때까지 내 몫을 남겨두곤 했다.


결정적으로 한낱 인간이 이 저주에서 더 이상 벗어날 수 없겠구나 싶었던 일이 있었는데, 저렇게 다수가 주문하는 메뉴를 시켰으나 늦게 나온 정도가 아니라 모두 식사를 마치고 점심시간이 다 끝날 때까지 내 식사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심지어 하나가 안 나왔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결국 내 메뉴는 부랴부랴 포장을 해올 수밖에 없었는데 이때 나는 본능적으로 수용했던 것 같다. 이 저주가 보통 강력한 저주가 아니라는 것을. 이 밖에도 비슷한 일은 계속됐다. 식당에 가면 음식물에 이물질이 나온다던가, 잘못 나온다던가 하는 일들. 그때마다 아내와 나는 '우리 한테 걸려서 다행이지, 진상한테 걸렸으면 어쩔 뻔했어'하며 오히려 식당을 위로했다.


그렇게 한 동안 비슷한 일이 없어서 이제 저주에서 벗어난 건 아닐까 은근히 생각하고 있는 요즘, 새로운 저주 아닌 저주에 또 걸렸다. 바로 커피만 마시려고 하면 가게에 손님이 방문하는 저주다.


코로나 19로 가게에서 종일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하다 보니 손님이 없는 틈에만 겨우겨우 커피 한 잔을 마실 수 있다. 반대로 코로나 때문에 거리에 사람들이 완전히 줄어든 바람에 평일 같은 경우는 오랜 시간 방문하는 손님 한 명 없이 보내는 시간들도 많아졌다. 그래서 손님이 한 동안 오지 않을 땐 뜨거운 커피 한 잔을 내려 마시곤 하는데, 그렇게 한동안 아무도 방문하지 않던 가게에 커피만 내리면 꼭 손님이 방문한다. 그것도 한참을 머물거나 연달아 방문해서 결국 커피는 한 모금도 못 마시고 이내 식고 만다. 손님이 계속 방문할 땐 아예 커피를 마실 생각조차 못하는데, 커피를 시도했다는 건 그만큼 한동안 방문하는 손님이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게 '이쯤 되면 한동안 아무도 안 오겠지' 싶어 기다리다 기다리다 커피 한 잔을 딱 내려 자리에 앉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꼭 손님이 방문해서 다시 마스크를 쓰고 곧 커피는 식어버린다. 


사실 이 커피의 저주 아닌 저주에 대한 글을 써야지 하고 마음먹은 지는 오래되었는데 오늘 드디어 쓰게 된 건 조금 전 커피를 한 잔 내렸음에도 손님이 오지 않아 이제는 끝났구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한 모금쯤 마셨을까 이내 손님이 또 들어왔고 커피는 또 식고 말았다 (그래서 요즘엔 텀블러에 담아 마시는 보완책을 쓰기도 하지만 역시 그 뜨거움은 똑같지 않다). 


요즘 같이 매장에 손님이 없고 매장 매출이 기록적으로 저조할 때, 그래서 손님 한 명 한 명이 귀할 때 이런 커피의 저주는 저주라기보다는 오히려 누군가 꼭 부리고 싶은 마법일지도 모른다. 나 역시 요새는 그런 생각을 자주 한다. '정말 오늘 손님이 한 명도 안 오는 거 아니야' 싶을 땐 나도 모르게 '음... 그럼 커피 한 잔을 내려볼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아직까지는 정말 커피 한 잔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는 호사를 더 누리고 싶다. 그리고 더 솔직한 심정은 만약 커피를 내리면 손님이 방문하는 마법을 부릴 수 있다면, 이 비장의 카드는 더 어려울 때를 위해 최대한 아껴두고 싶다. 지금도 정말 힘든 시기이지만 최대한 버티는데 까지 버텨보고, 언젠가 정말 아무것도 자력으로는 할 수 없을 때, 그래서 마법이라도 부리고 싶은 순간을 대비해 이 비장의 카드는 최대한 아껴두고 싶다.


그렇게 오늘도 가게에서 뜨거운 커피는 마시지 못했다. 그래도 아직 내게 비장의 카드는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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