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에게 필요한 것인지를 제대로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스펙이라는 이름 하에 불리는 것들. 학력 혹은 자격증이나 실제 업무 경력 이외에 눈에 잘 보이거나 이력서에 한 줄 추가하기에 적절한 것들. 난 스펙이라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회사 생활을 한 입장이라 ‘스펙'이라는 단어보다는 오히려 ‘타이틀'이라는 단어가 더 가깝게 들린다.
스펙이라는 세상의 기준에 맞춘다면 나는 고졸이다. 나의 반 스펙 정서는 고등학교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 같은데, 나름 공부도 못하지 않고 놀기도 적당히 놀던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맹목적으로 대학을 가는 행태가 처음부터 몹시 못 마땅했던 것 같다. 내가 배운 바로는 하고 싶은 공부를 더 하는 곳이 대학이었는데 현실은 갈 수 있는 곳을 맞춰 가야 하는 것이었고, 그렇게 라도 가야만 사회에서 그나마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이 처음부터 그냥 마음에 들지가 않았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지금보다도 더 고집스럽고 불필요한 의협심 혹은 정의로움에 가득 차 있던 시절이었다. 그냥 ‘난 이러저러해서 대학에 갈 생각이 없어’정도로 생각하면 되는데, ‘대학을 가야만 인정받는 현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라도 대학을 안 간 내가 꼭 잘 되겠어'라는 결의(?)가 당시에는 제법 강했었다. 더군다나 당시 나는 대학을 가도 가장 잘 갈 법한 이미지(?) 혹은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잘 됐다 싶어 이를 이용해 정 반대의 현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지금 와 생각해 보면 뭘 그렇게까지 했나 싶은데, 어찌 되었든 대학을 가야 하는 것이 기본은 아니라는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긴 요새는 꼭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도 싶다.
이번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렇게 고졸로 아무런 스펙 다운 스펙 하나 없는 이가 15년 넘게 어떻게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 그것도 제법 괜찮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다. 정식 회사 생활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던 아르바이트를 제외하고 처음으로 들어간 회사는 당연히 아르바이트에 가까운 단순 업무 위주였다. 어린 나이라 단순 업무에 대한 불만도 없었고 오히려 좋아하는 음반 관련 일을 할 수 있어서 즐겁게 일했던 편이었다. 그렇게 몇 번의 회사를 거치면서 아무런 스펙 없던 내가 작은 승진이라도 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기회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상급자가 퇴사하는 기회. 실제로 대기업이 아닌 경우 대부분의 작은 회사에서 승진은 상급자가 퇴사할 때 이뤄지곤 한다. 상급자가 퇴사하게 되면 그 업무를 인수인계받을 적임자를 찾게 되는데, 만약 부사수가 해당 업무를 가장 잘하는 직원이라고 판단되면 특별히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하거나 다른 직원을 앉히는 것 대신, 스펙이나 나이는 떨어지더라도 부사수를 선택하게 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으면 기회가 반드시 생긴다는 조언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부사수에게 업무를 맡기는 것이 가장 효율적임에도 스펙이나 나이 등을 이유로 다른 직원에게 맡기는 회사들도 있지만, 그건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일단 불리한 조건 속에서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는 건 단순하거나 작은 일이라도 그 일에 마스터가 되는 것이다 (이 단락은 뭔가 성공과 관련된 다른 책들이 연상되 낯간지럽다).
그렇게 차근차근 오르다가 한 회사에서 오랜 시간을 근무하게 되었고, 이직이라는 새로운 환경 다시 말해 제로부터 다시 시작하는 과정이 없다 보니 더 높은 직급까지 오를 수 있었다. 직책으로는 팀장, 실장, 본부장 등 경영진에 버금가는 관리직에도 있어봤고 직급으로는 30대 초반이라는 나이와는 어울리지 않게 부장님 소리도 들었었다. 다른 얘기지만 나는 ‘부장'이라는 직급이 참으로 어색했다. 젊은 대표나 젊은 사장은 있어도 젊은 부장은 없지 않나 ㅎ. 더군다나 자랑은 아니지만 나이보다는 어려 보이는 외모와 상반되는 나이 들어 보이는 직급의 부조화는 도움이 되기보다는 불편한 쪽이었던 것 같다 (이 외모, 나이에 대한 이야기는 따로 또 할 예정). 내가 다녔던 회사는 스타트업이어서 아무래도 직급 체계가 일반적인 회사와는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을 텐데 (이것도 다니면서 항상 애매한 부분 중 하나였다), 보편적인 회사의 직급 체계로 보자면 과장 정도였다고 볼 수 있겠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렇게만 보면 계속 상급자가 관두는 상황을 놓치지 않고 기회를 잡아 그 자리(?)까지 오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당연히 그렇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대리까지는 큰 불편이 없었으나 과장 이상의 직급과 팀장 이상의 직책을 갖게 되면서부터는 조금 불편한 일들이 생겼다. 일단 대학 나온 보통의 사람들은 스스로 인지 하지 못할 수 있는 부분인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미팅이나 회식 자리에서 ‘몇 살이세요?’라고 묻는 대신 ‘몇 학번이세요?’라고 묻는 경우가 많다. 혹은 ‘전공이 뭐예요?’라던가. 나는 그럴 때마다 ‘아, 저 대학을 안 가서요’라고 대답해야 했는데 사실 나는 그 사실이 한 번도 창피하거나 부끄러운 적이 없었지만 그렇게 대답하고 나면 대부분은 질문을 한 상대가 불편해하는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항상 돌아왔던 대답은 ‘아, 그런 줄 몰랐어요'였다. 그러니까 ‘팀장님, 고졸로 안 보여요'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물론 이 대답은 학력이나 직급을 아주 단순하게 (하지만 악의는 없이) 연결 지은 말이지만, 난 대부분의 대졸자들에게 고졸자로 느껴지지 않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적지 않게 했었다. 업무 적으로 회의를 하거나 미팅을 할 때 주도권을 대부분 내가 가질 수 있도록 미리 준비했고 그 덕에 상대가 나를 최소한 업무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었었다. 그렇다 보니 ‘고졸이에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상대가 놀라기는 했으나 그 놀람이 무시나 평가 절하로 이어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또 심한 자기 자랑 같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되어서는 안 되는 점이 있다. 남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특히 같은 직급 더 나아가 낮은 직급의 직원들보다도 부족한 스펙을 가지고 있었기에 매번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야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른 회사와의 미팅 자리라던가 마케팅 회사로서 광고 계약을 수주해야 할 때, 어떤 역할이나 업무를 누구에게 맡길 것인가에 대한 후보가 될 때를 비롯해 많은 비즈니스 적인 상황에서 ‘나는 대학 졸업장이나 다른 자격증 등이 없는 대신에 이런 능력이 있습니다’라는 것을 눈에 보이지 않게, 가끔은 눈에 보이도록 증명해야만 했다. 눈에 보이지 않게 증명하는 경우는 오랜 시간을 통해 자연스럽게 증명할 수 있어서 오히려 자신이 있었으나 가끔 단 시간 내에 눈에 보이도록 증명해야 하는 경우는 결코 쉽지 않았다. 새로운 회사의 입사를 하는 경우 또한 아무래도 회사가 나를 판단할 수 있는 자료는 스펙이라고 불리는 데이터 밖에는 없기 때문에, 이 외에 것들을 어필하는 방법을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입사 과정으로 미뤄보자면 나는 대졸자만 가능이라는 채용 요건을 보고도 그냥 이력서를 넣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 같다. 남들 다 있는 대학 졸업란이 비어 있다 보니 그 대신 자기 소개서를 더 열심히 쓸 수 밖에는 없었고, 이 자기 소개서를 읽고 대졸 이상 채용이었음에도 면접까지 가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가 필수다. 첫째는 뻔한 대졸자 스펙 이상으로 신선하고 감동적인 자기 소개서를 써야만 하고, 둘째는 이런 자기소개서를 대졸 스펙보다 더 인상 깊게 봐줄 인사 담당자(회사)를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어렵게 1차 서류 심사를 통과하면 그다음 나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는 오로지 면접 밖에는 없었다. 사실상 나는 모든 것을 면접에 걸었다고 봐도 된다. 그리고 면접은 어느 회사든 다 자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면접을 보고 나면 결과 통보를 받기 전에 대부분 채용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어떤 회사는 ‘나 같은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회사네'라는 느낌을 받은 한 편, 어떤 회사는 ‘이렇게 면접을 봤는데 이건 안 뽑을 수가 없다'라고 생각되는 회사도 있었다. 이런 느낌은 나중에 마케팅 회사를 다니면서 업무 미팅을 할 때도 똑같이 느낄 수 있었다. 미팅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바로 촉이 왔다. ‘계약을 할 수 있겠구나’ 혹은 ‘어렵겠구나'하는.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조금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었던 것 같다. 안될 일은 과감히 감을 믿고 매달리지 않는 것으로.
멀리 돌아왔는데, 그래도 스펙이 필요하냐고 묻는 다면 솔직히 ‘회사를 오랜 시간 열심히 다닐 거라면' 굳이 남들보다 부족한 조건에서 시작할 필요는 없지 않나 라고 말하고 싶다. 나는 내가 이렇게 오랜 시간 회사 생활을 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흘러 흘러 온 케이스고, 그렇기 때문에 매번 스스로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도 큰 스트레스 없이 버텨온, 조금은 일반적이지 않은 경우라 보편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듯 하다 (확실히 다시 생각해봐도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만약 내가 동료 혹은 회사 내 다른 직원들과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임했다면, 처음부터 엄청난 스트레스와 부담감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면에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나는 진짜로 단 한 번도 학력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생활에서는 물론 업무적으로도 없었고, 오히려 회사에서는 이 점을 장점으로 적절히 어필했던 것 같다.
질문으로 돌아와 ‘스펙은 과연 필요한가'라고 다시 묻는 다면 난 두 가지로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대기업이나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회 속에서 경쟁을 하려는 것이라면 스펙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만약 스펙과 상관없이 능력이 더 인정받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려거든 스펙보다는 실제 업무 경력을 쌓는 편이 더 낫다고 말이다. 두 가지 대답만 놓고 보면 후자가 더 멋있어 보이고 그럴 듯해 보이지만, 확실한 것은 후자는 여러 가지 상황이나 운마저 따라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후자를 선택했다가 본인에게 맞지 않거나 상황이 바뀌어서 다시 전자를 선택하려고 하면 이미 너무 늦어버린다는 사실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난 그래도 운 좋게 후자가 가능한 회사들을 계속 옮겨가며 다닐 수 있었기에 나름 괜찮은 회사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스펙이 필요한가 라는 질문은 결국 자신이 회사라는 곳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문제다. 스펙을 중요시하는 사회에서 경쟁하는 것이 결코 무식하거나 덜 멋져 보인다고 생각해서 후자를 선택한다면 그거야 말로 어리석은 선택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스펙이 중요시되는 회사나 비즈니스가 왜 그것을 중요하게 고려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스펙이 반드시 업무에 필요한 회사나 비즈니스를 동경한다면 스펙 쌓는 것을 결코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난 반대로 요 몇 년간 스펙이라는 주제를 다루는 사회 현상을 보면서 너무 부정적으로만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마치 스펙을 열심히 쌓는 이들이 무언가 잘못되고 어쩔 수 없이 수동적으로 경쟁에 끌려만 가는 것으로 묘사되는 경향이 있는데, 물론 부정적인 측면이 많지만 정반대로 그저 ‘스펙 쌓기는 쓸데없는 것'으로 일반화 해서 모든 것을 즉흥적인 것에만 맡겨버리는 경향도 그 못지않게 어리석은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내 일에, 내 회사에 스펙이 필요한가 아닌 가를 꼭 따져봐야 할 것이다. 난 스펙이라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서 여전히 스펙 쌓기는 의미 없다고, 아니 의미 없는 삶을 살아왔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스펙 쌓는 것에 많은 시간과 돈과 노력을 투자한 이들을 의미 없는 일에 삶을 낭비해 버린 이들로 생각하는 것에 부정적이다. 설령 스스로가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고 느낄지언정, 그 시간이 결코 헛되지 만은 않았을 것이라는 건 보고 느꼈던 경험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