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험과 패기, 모두 따져보지 않을 수가 없다
사회 초년병 시절 그리고 회사를 들어간 지 오래되지 않아 아직 그 업무에 전문가라고 말하기는 어렵던 시절. 일을 하면서 가장 답답했던 것 중 하나는 선임자와의 대화 중 내가 어떤 아이디어나 실행 안을 내놓았을 때 '그건 내가 해봐서 아는데 별로야' '우리도 해봤는데 그건 안돼' 같은 대답이 돌아왔을 때였다. 아주 간혹 왜 안되는지에 대해 내가 충분히 납득할 정도로 설명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무슨 말하는지 다 알겠는데, 그거 결국은 안돼'라는 식으로 맥 빠지게 만드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선임자로부터 저런 대답이 돌아왔을 때 답답해하던 나의 논리를 단순하게 말하자면 '해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였다. 물론 선임자는 해봐서 안된다고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그래도 '해보지도 않고'라고 말했던 건 선임자가 겪었던 상황과 지금의 상황이나 환경이 반드시 동일하다고 볼 수 없고, 그 당시 실패했던 이유가 반드시 계획과 방식에 있었던 것 만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아이디어나 방식은 맞았는데, 실행력이나 과정 중의 실수, 부족 등으로 달성하지 못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점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는 무슨 아이디어나 계획만 내면 십중 팔구는 '그건 해봐서 아는데 안돼요'라는 답이 돌아오곤 해서 '아니 그럼, 도대체 되는 건 어떤 거냐?' '그럼 그냥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건가'라는 심한 무력감에 빠졌더랬다. 이걸 돌파하기 위해서는 선임자나 회사가 기존에 경험해보지 않았거나 다수가 동의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내놓는다거나, 아니면 '그래도 이번엔 다를 거다'라는 결의와 함께 또 실패했을 시에는 어떻게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 밖에는 없었는데, 전자의 경우는 희박했고 후자의 경우는 사실 성공하더라도 선임자나 회사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웠던 터라 이래저래 딜레마였다 (왜 후자의 경우도 그러했냐면, 저렇게 후임자가 우기다시피 해서 어떤 일을 성공시켰을 경우 이를 반대했던 선임자나 회사 입장에서는 실수나 오판을 한 것이 되기 때문에 어지간한 회사가 아니면 이를 달갑게 여기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내가 선임자가 되었을 때다. 이 두 가지 상황이 100% 똑같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내가 선임자가 되었을 때 후임자나 다른 동료의 어떤 의견에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식의 답을 하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때는 입장이 바뀌어서 인지 내 대답은 '경험'이라는 것으로 포장되었다. 그리고 자랑은 아니지만 실제로 경험적 판단으로 내렸던 '안돼요' '무의미한 작업이에요' 혹은 '다 안되고 하지만 이건 돼요'라고 말했던 결정들이 결국엔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더 많았다. 내겐 바로 이 '경험'이라는 것이 남들에 비해 내가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장점이어서였는지 몰라도, 이렇게 내린 경험적 판단은 적중률이 꽤 높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후임자일 때 겪었던 선임자로부터의 답답한 대답이 '아, 다 이유가 있었구나'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이렇게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선임자가 되고 나니 실제로 아직 업무나 업계에 장악력이 떨어지는 후임자가 패기 넘치게 던지는 아이디어 가운데는 허망하고 대책 없는 경우나, 겉으로는 멋지고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적인 문제들에 대해서는 대충 넘어가버린 허점 많은 계획들이었고, 그런 점들이 쉽게 눈에 보였다. 물론 가끔은 '왜 나는 저런 걸 생각하지 못했지?'라는 각성이 들 정도로 괜찮은 아이디어들도 있었다.
내가 후임자일 때 이 답답함을 몹시 크게 느꼈던 경험이 있었기에 이후 내가 선임자가 되었을 때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내겐 상당히 중요한 문제였다. 설령 100% 확신하는 경우라 하더라도 선임자가 '이건 내가 잘 알아, 여기서 접는 게 맞아'라고 얘기했을 때 패기 넘치게 아이디어를 냈던 후임자는 힘이 빠질 수 밖에는 없고, 회사 일의 특성상 이 아이디어의 성패는 한참 뒤에 드러나거나 혹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더라 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이 결과가 대부분의 관심에서 멀어졌을 때가 더 많기 때문에, 아이디어를 냈던 후임자는 아이디어가 수렴되지 못했던 그 당시의 답답함만 각인되어 불만으로 누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결국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딜레마를 푸는 방법은 이 자체의 문제에 있다기보다는 이 대화의 주체가 되는 이들 간의 공감대에 있었다. 선임자로서 후임자에게 업무 장악 능력 및 일에 대한 충분한 공감대 즉, 단순히 내가 먼저 들어왔고 나이도 많고 일도 더 했으니까 무조건 믿어 라는 식의 일방적 공감대가 아니라, 후임자가 진심으로 선임자를 업무에 있어서 인정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다면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고 얘기했을 때 적어도 '뭐 다 안된데!'라고 답답해 하지 만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선임자의 역할이 더 중요할 수 밖에는 없다.
선임자로서 후임자가 어떤 의견을 냈을 때 만약 그 의견이 별로거나 의미 없다는 판단이 들 경우 너무 쉽게 '네가 뭘 알겠니..'라는 식으로 단칼에 잘라버리기 보다는, 회사나 업무에 큰 피해를 주지 않는 선이라면 일단 후임자의 아이디어대로 진행을 해보도록 하고, 결과가 (예상대로) 좋지 않았을 경우 왜 잘 되지 못했는지를 함께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까진 잘 했는데 끝에 가서 '것봐, 내 말이 맞지?'라고 해버리면 그것 역시 힘 빠지고 무력감이 드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의 프로젝트를 같은 방향성으로 함께 경험하고 나면 결과가 성공이든 실패든 확실히 팀 혹은 회사는 견고해지기 마련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선임자의 역할과 자세다. 후임자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있어서 '그래 어디 니 생각대로 해봐'라는 식으로 수렴한다면 이건 거절했을 때보다도 못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는 없을 것이다 (이렇게 놔둘거라면 차라리 매몰차게 첨부터 거절하는 편이 서로에게 좋다). 실제로 내가 후임자의 입장에 서서 이런 식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을 때 선임자나 회사가 '그래 어디 맘대로 해봐, 방해는 안 하지만 도와주지도 못해'라는 자세를 취한 적이 있었는데,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프로젝트의 결과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나와 회사의 관계는 좋은 결과를 만들지 못했다. 실패했을 땐 '것봐, 안된다는 걸 우기더니 왜 말을 안 들었어'라는 핀잔을, 성공했을 때도 회사는 '아이고, 우리가 잘못 알았네요. 다음부터는 더 믿을게요'라는 반응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바란 적도 없었지만). 성공해도 같이 성공하고 실패해도 같이 실패해야 결론적으로 의미 있는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회사가 함께 경험하는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그래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리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고.
선임자는 책임을 지기 때문에 선임자의 역할을 맡긴 것이다. 선임자로서 이미 해봐서 아는 경험을 후임자에게 전달하는 것에 있어서 업무적으로 100%의 적중률을 보였다 한들, 후임자로부터 공감대를 얻지 못한다면 반쪽뿐인 경험의 활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고, 반대로 경험적 판단과 어긋나지만 후임자의 의견을 적극 수렴할 경우도 그 과정을 꼭 함께하고 결과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진짜 '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경험을 더 값지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선임자로서 절반은 성공했고 절반은 실패했다. 아니 대부분 실패였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 글도 다 쓰고 보니 결국엔 '내가 다 경험해봐서 아는데...'로 읽을 수도 있으니...
에라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