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함은 여전하고 두렵지만, 그럼에도 분명 더 행복해지는 결정이었다
어느덧 회사를 관두고 반 년 넘게 흘렀다. 시간 참 빠르다.
무계획으로 회사를 관두면서 딱 하나 계획했던 건 한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빨리 회사 생활의 관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다. 거의 16년 만에 주어진 것 이런 공백의 기회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더 이 공백의 시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지 않고 공백으로 남겨두는 것이 간절한 목표였다.
나는 한 때 봇이라는 장난스러운 오해가 있었을 정도로 실시간으로, 그리고 동시다발 적으로 많은 정보와 업무 관련 정보 등을 체크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이 특기이자 버릇이었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를 관두고 나서 한참 시간이 흐르기까지 홈페이지를 거의 매일 들락날락 거리며 관리 아닌 관리를 하기도 했었고, 마치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처럼 업계의 분위기와 정보를 살피는 경우가 잦았었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음반 관련 쇼핑몰을 다니다가 관둔지 수개월 뒤, 어떤 음반을 찾지 못한 직원이 나한테 연락해서 위치를 물어봐 내가 전화로 기억을 더듬어 찾아 준 적도 있었다. 기억력이 좋아서 라기보다는 그만큼 이전 회사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이번에 회사를 관둘 땐 큰 맘먹고 이런 습관을 의도적으로 막고자 노력했다. 회사가 운영하는 서비스 홈페이지도 일부러 거의 접속 하지 않았고, 동료들과도 한 동안 연락하지 않는 것은 물론, 보통 같으면 관련 키워드들을 하루에도 수십 번 검색해 보며 동향과 정보를 얻었을 텐데, 의도적으로 회사와 업무, 업계의 정보에서 멀어지고자 했다. 사실 나는 성격도 그렇고, 그것이 습관화된 것도 있고, 수년을 해 온 업무이자 업계이다 보니 궁금한 것들도 많아 이를 억누르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내가 하다가 중간에 마무리 짓지 못한 사업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친한 동료들은 또 어떻게 변화하는 회사 속에서 잘 지내고 있는지 등 궁금한 점이 많고 물어보거나 찾아보고 싶은 것들이 많았지만, 하나도 찾지 않고 묻지 않았다. 그렇게 일부러라도 억누르지 않으면 애초 퇴사를 결심했던 때 이루고자 했던 것들을 그르칠 확률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었다.
퇴사하고 나서 새삼 알게 되었지만, 난 참 회사라는 곳, 일이라는 것에 깊이 물들어 있었더라.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말이다. 늦잠을 내가 자고 싶을 때까지 자 보고 싶었는데 알람 없이도 매번 출근 시간엔 눈이 떠졌고, 대낮에 사람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는 것이 소원 아닌 소원이었는데 막상 그런 외출이 일탈로 느껴지지 않기 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긴 머리로는 잊어도 몸이 기억할 정도로 오래 다녔던 회사 생활인데, 어디 한 순간에 바뀔 수 있겠나.
내가 너무 단호하게 퇴사하는 것을 본 혹자는 무언가 완벽한 계획이 있거나 준비가 되어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사실 그렇지 않았다.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유일한 계획이기는 했지만 그 계획을 달성해 가는 과정에서도, 그리고 그 계획이 점점 달성되는 순간에도 불안함은 항상 공존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건 예상했고 기다렸을지언정 조금도 덜하지는 않았다. 글의 맥락으로 보면 '즐겼다'라고 쓰는 편이 더 자연스러울지 모르겠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결코 즐기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불안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끗하게 인정하고 피해를 최소화했달까. 그 정도.
지금까지 회사를 다니면서 딱 한 번 이직할 곳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무작정 퇴사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의 공포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그때는 지금과는 비교 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였기에 하루하루 조여 오는 공포는 다시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두려운 경험이었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때보다는 훨씬 좋은 상황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공백'을 가질 수 있는 너무나도 소중한 기회라는 것)이기는 하지만, 퇴사 뒤 찾아오는 불안함의 공포를 너무 잘 알면서도 퇴사를 결심했다는 얘기다.
퇴사 후 원하던 공백을 가질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불안함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불안함은 항상 함께 하고 있다. 무엇이 될지 모른 다는 두려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에 대한 불안함은 수 만번 고민한 뒤 결심한 퇴사였다고 해도 지워낼 수 없었다.
하지만 무엇이 될지 모른다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것은 불안함과 동시에 호기심과 나쁘지 않은 긴장감으로 다가왔다. 남들은 20대에 느꼈을 호기심과 긴장감을 30대 중반이 넘어서 겪는 다는 것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말그대로 순서만 바뀌었을 뿐 그 감정의 순도는 아마 다르지 않을 듯 하다.
퇴사를 하겠다고 얘기하고 나서 동료에게 '제가 지금 무슨 결정을 한 건지 나중에야 깨닫게 될지도 몰라요.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죠'라고 얘기했었는데, 이 정도 되었으면 분명히 얘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퇴사하길 잘 했다. 그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지 스스로에게 위로하는 말이 아니라는 걸 선뜻 믿기 어렵겠지만 정말로 그렇다.
퇴사하길 잘 했다. 그건 분명 더 행복해지는 결정이었다. 그걸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