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감수해야 할 것들

감수해야 할 것들과 싸우는 중이다

by 아쉬타카

회사를 관두기로 결심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고, 퇴사 후 가장 큰 스트레스이기도 한 것이 바로 업종 전환에 대한 어려움이었다. 같은 분야의 다른 회사로 이직하는 경우라면 좀 덜할 텐데,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업계를 떠나 전혀 다른 세계에 발을 들이는 일은 예상대로 힘겹고 불안한 날들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는 이번 말고도 한 번 커리어의 큰 변화를 감수했던 때가 있었다. 첫 직장을 얻고 거의 8년 동안 일했던 업계는 이른바 음반과 DVD를 판매하는 온라인 쇼핑몰 시장이었다. 4군데 정도의 회사를 옮겨 다녔는데, 다 각자 성격이 다른 곳이라 조금씩 얻는 것들이 달랐고 그렇기에 다음, 그다음 회사로 이직할 때마다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거나 스카우트될 수 있었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한 업계에 8년 가까이 있다 보니 업무 장악력만 놓고 보자면 어떤 회사에 데려다 놔도 당장 실무를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자신감이 있을 정도로) 일이 손에 완전히 익어 있는 상황이었다. 이 때는 지금처럼 확고한 결심을 가지고 퇴사를 했다기보다는 몇 개월간 의도했던 구직활동이 잘 안되기도 한 김에 이 때다 싶어 다른 업종으로 전환을 꾀한 경우였다.


그때 전혀 다른 업종으로 이직할 때도 감수해야 할 것들이 있었다. 업종이 다르다 보니 회사 생활 경력은 많았지만 업무 경력으로 100% 인정받지 못하는 것, 즉 연봉에 있어서 감수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었고, 다시 처음부터 배우는 심정으로 임해야 하는 것들도 당연히 감수해야 할 부분들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이때만 해도 어렸던 것 같다.


하지만 이번엔 그때와는 확실히 여러 가지가 달라졌다. 감수해야 할 것들의 크기는 훨씬 커졌고, 과연 할 수 있을까 싶은 것들이 현실로 다가왔다. 일단 이번 퇴사는 이전 퇴사와는 비교 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전혀 다른 업계로의 도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지난 8년 간 디지털 마케팅과 인터넷 서비스 기획/개발 분야에서 어느 정도 관리자 레벨까지 올라갔던 것이 걸림돌 아닌 걸림돌이 되었다는 점이다. 나름 한 분야에서 감사하게도 어느 정도 업무 능력을 인정받았던 경험이 새로운 출발에는 자존심이라는 이유로 작은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막상 영화 혹은 글 쓰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려고 보니 부딪히게 된 가장 큰 벽은 어설프게나마 잠시 앞서 있었던 과거의 나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아예 새로운 분야에 처음 뛰어드는 경우였다면 차라리 별다른 아쉬움도 기대하는 바도 없었을 텐데, 회사를 다니면서도 아주 예전부터 영화와 글 쓰는 일과 관련해 조금씩 일들을 해왔던 것이 오히려 새로운 출발에 큰 짐이 될 줄은 몰랐다.


지금 와 생각해보면 나는 운이 좋게도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좋은 기회들이 많았던 것 같다. 그저 내 블로그와 영화 커뮤니티에 영화 글을 꾸준히 올렸을 뿐인데 많은 분들이 기억해 주었고, 그로 인해 이런저런 좋은 기회들을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회사를 다니는 와중에 잠잘 시간을 투자해서 열성적으로 했던 활동들과 그로 인한 결과들은 대부분 기대 이상의 감사한 결과물이나 의도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여러 번 만끽하게 해주었었는데, 막상 그 일을 한 번 제대로 해보려고 보니 나는 그동안 너무 많은 시간을 회사에 빼앗겨 버렸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경쟁자? 동료? 들에 대한 감정이 없을 수가 없다. 이런 표현이 참 우습지만 일종의 경쟁에서 내가 앞서 있었고, 앞서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시점에서 냉정하게 판단해 보니 과거 내 뒤에 서 있다고 생각했던 이들은 어느새 한참을 앞서서 이 분야에서 커리어를 차근차근 발전시켜가고 있었고, 그런 존재는 한 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몇몇은 그래도 금방 따라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나와는 별개로 그들의 수준이 별로 대단하지 않다고 마냥 생각했었는데, 솔직히 냉정하게 봤을 때 '내가 저것보다 더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아예 조금이나마 앞서 있었던, 좋은 기회를 먼저 얻었었던 경험이 없었더라면 이런 감정도 안 들었을 텐데, 막상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한참의 시간을 뒤쳐져 있다는 걸 깨닫고 나니, 이거 참 마음이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빠르게 이 상황을 인정했다는 점이다. 아주 쿨하기 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법 빠른 시간에 내 부족함과 뒤쳐짐을 인정했고, 인정하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열등감과 무력감이 몰려왔지만 이것도 생각보다는 심하게 겪지는 않았던 (않고 있는 중인)것 같다.


이렇게 새로운 시작은 감수해야 할 것이 역시나 많았다. 특히 경력을 단절하고 새로운 경력을 쌓아가는 것은 예상대로 많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고, 특히 나는 과거의 나를 냉정하게 다시 보고 버릴 것은 빨리 버리는 일과 마주해야 했는데, 이건 단순히 감수하는 것 이상의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요즘 감수해야 할 것들과 싸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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