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에서 깨어 나오는 듯한 과정의 연속
어떤 타이틀을 얻는다고 인생이 하루아침이 바뀌는 건 아니다. 그냥 나를 수식하는 수식어가 하나 더 생기는 것뿐. 오히려 ‘박사’ 타이틀이 생기니 살짝 부담이 될 때도 있다. 차라리 박사과정생일 때가 더 좋았던 것 같기도 하고. 박사 졸업을 하고 난 후에도 나의 삶은 똑같았다. 컨설팅 업무를 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거기에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일과 학술 논문을 리뷰하는 일이 추가됐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학술 저널 웹사이트 및 관련 분야 학자 사이트에 내 이력과 연구 분야를 등록하니 학술 저널 리뷰 요청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박사 학위 논문을 갖고 은사님들을 찾아뵈었다. 나의 멘토 중 한 분은 논문을 쓱- 훑어보시더니 구조와 내용의 완성도가 높다고 하셨다. 이분께 석사 논문을 갖다 드렸을 때는 "여기저기 고칠 점이 많다"는 평을 들었었기에 이번 코멘트에 우쭐해졌다. 그분은 "학위 논문은 일기에 불과하고, 이제 학술 논문 작성해야지"하셨다. 교.. 교수님... 학위 논문이 일기라고요? ㅋㅋㅋㅋ
박사학위논문은 일기에 불과하다.
진정한 학술적 기여는 저널 퍼블리케이션 (학술 논문 작성)
풀타임 박사 과정은 박사 과정에서는 박사 과정 중에 학술 논문을 작성한다. 주저자든 공저자든... DBA는 과정 중 학술 논문 작성은 필수 사항은 아니었지만, 동기들 중 2학년 때부터 학술 논문을 작성하는 케이스도 있었다. 나는 박사 학위 논문을 작성하는데도 벅차서 학술 논문 작성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나에게 학술 논문은 엄청난 실력이 요구되는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다.
Viva를 앞두고 참석했던 학회에서 발표한 내용으로 정성적 연구에 특화된 국제 저널에서 투고 요청이 들어왔다. 굉장히 좋은 기회였는데, 좋은 기회가 너무 쉽게 오면 기회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당시 나는 다른 국내 학회에서 받은 요청으로 정신이 없어 그 기회를 날려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국내 학회에는 처음 참석하는 거라 잘 몰랐는데, 그 소중한 기회를 날리면서까지 집중할 필요가 전혀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심지어 2개를 병행할 수도 있었는데, 난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않는다. 그냥 그때의 선택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고 생각하는 수밖에.
학술 논문:
어떤 문제에 대한 나의 관점과 의견을 6,000-12,000자로 논리 있게 작성하는 글. 신뢰성 있는 자료와 데이터로 뒷받침해야 하고 동료 학자들의 평가를 받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논문을 작성 후 저널에 투고한 이후 출판하는데 최소 3개월에서 3년까지도 소요될 수 있다.
Journal writing is a slog!
학술 논문 작성은 어렵고 지루한 일
- 울 지도교수님 -
박사 논문의 결과물인 호텔 사례로 도출한 브랜딩 프레임워크를 주제로 학술 논문을 작성하기로 했다. 먼저 논문의 방향성과 구조, 타깃 저널에 대해 스카이프로 미팅을 하고, 내가 1차 작성해서 지도교수에게 보내면 교수님이 리뷰하고 수정해서 나에게 다시 보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문제는 이렇게 논문이 오가는데 시간이 꽤 많이 걸린다는 것. 교수님도 나도 다른 일들을 하면서 자투리 시간을 내서 하는 거라 진도가 영 안 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2018년 12월 말... 이렇게 해선 안 되겠다 싶었다.
아예 영국에 방문해서 논문에만 올인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수님이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의견을 묻기로 했다. 2019년 2월 중에 내가 영국에 가서 이 페이퍼를 함께 작업하는 것이 가능할지를 문의하는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은 흔쾌히 좋다고 했다. 우리의 목표는 10일간 페이퍼를 완성하고 투고까지 하는 것!
최대한 시간을 아끼기 위해 구조와 각 섹션별 다뤄야 할 내용을 간략하게 작성했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도 수정에 수정을 거쳐 설득력 있는 뼈대가 완성됐다. 교수님은 당신의 오피스에 있는 빈 원형 책상을 나에게 사용하란다. 일주일간 누군가가 자신의 오피스에 상주하는 것이 참 불편한 일이었을 텐데.. 지금 생각해도 감사하다. 그렇게 월요일 오전부터 금요일 오후까지 꼬박 5일간 페이퍼 작성에 올인했다.
이 일주일간의 시간은 나에게 정말 값진 경험이었다. 지난 5년간 지도를 받긴 했지만 이렇게 한 공간에서 업무를 해본 적은 없었다. 교수님의 일하는 스타일도 파악이 되고 어떤 성향 인지도 조금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교수님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었던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다. 챕터별로 내가 1차 작성해서 드롭박스에 저장하면 지도교수가 수정하면서 궁금하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을 나에게 바로바로 물어보고, 나 역시 헷갈리는 부분이나 막히는 부분이 생겼을 때 바로 논의할 수 있어 일이 착착 진행됐다. 금요일 오후 우리의 페이퍼가 완성됐다.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환대산업의 top 5 저널 중 하나에 호기롭게 제출했다. 워낙 리젝률이 높은 곳이라 데스크 리젝(동료 평가 이전 에디터선에서 바로 리젝) 당할 생각을 하고 투고했다. 그런데 리뷰어 리뷰까지 넘어가서 장장 5개월의 인고의 시간이 시작됐다. 5개월을 기다렸으나 3명의 리뷰어 중 2명이 리젝을 해서 최종 결과는 리젝이었다. 굉장히 실망스러운 결과였지만, 리뷰어들의 코멘트를 읽으며 페이퍼의 부족한 점을 알 수 있었다. 또 그 5개월 새에 내가 또 성장한 것인지 예전에 제출했던 페이퍼를 다시 읽어보니 제출 전에는 그렇게 완벽해 보였던 것이 또 엉망진창이구나 싶었다.
리젝의 충격을 뒤로하고 재빨리 두 번째 투고할 저널 탐색에 돌입했다. 브랜딩 쪽 유명 저널에서 '환대산업에서의 brand co-creation'과 관련된 페이퍼를 9월 1일까지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게 됐다. 8월 마지막 주부터 미국 출장이 계획되어 있어 조금 숨 가쁜 일정이지만 도전했다.
출장 3주 전에 수정해서 지도 교수께 보내고 미국 공항에서 교수님 코멘트 메일을 받아 호텔에서 최종 수정을 하고 8월 29일에 투고했다. 투고 1달 반 만에 Major revision으로 답장이 왔다. 지난번 저널에 비해 리뷰 기간도 엄청 짧고, 수정의 기회가 주어진 것에 뛸 듯이 기뻤다. 리뷰어들의 뼈 때리는 코멘트에 순살이 되긴 했지만... 그래도 수정에 수정을 거쳐 투고 1년 만에 출판에 성공했다!
학술 논문 리뷰 프로세스는 내 글을 객관적으로 평가받고 성장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만, 정말 지루하고 지루한 과정이다. 리뷰어들의 코멘트가 담긴 메일을 받으면 파일을 열기도 전에 가슴이 콩닥콩닥, 손이 덜덜 떨린다. "이번엔 또 얼마나 뼈 때리는 이야기들이 있을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의 코멘트도 있지만, 잘 한 부분에 대해서는 칭찬하는 코멘트도 있기에 수정할 힘을 얻는다.
저널에 따라 다르지만, 보통 리뷰 프로세스만 1-3년이 걸리기도 한단다. 내가 두 번째로 투고한 저널의 경우, 에디터가 빨리빨리 처리하는 성격의 분이라 4번의 수정본을 제출했는데도 1년 만에 accept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첫 번째 투고했던 저널처럼 한 번의 리뷰 프로세스가 5개월 정도 걸린다고 하면 진짜 2-3년은 훌쩍 가게 되는...
The publishing process does not match the pace of the world we live in.
우리가 사는 세상의 속도와는 전혀 맞지 않는 학술 논문 출판 프로세스
- DBA 동기이자 컨설턴트인 나의 베프 -
에디터로부터 최종 출판 결정 메일이 오면 저널 출판사에서 논문 관련 윤리서약서와 사용한 사진 파일의 저작권 작업, 최종 편집본 확인에 대한 메일이 온다. 윤리서약서는 저널 페이퍼의 내용이 다른 저널이나 매체에 출판된 적이 없는지의 여부를 확인하는 작업이고, 논문에 삽입하는 사진은 원 저작권자에게 일일이 사용 가능 여부를 컨펌해야 한다. 모든 확인 작업이 끝나면, 출판사에서 논문 원고, 표, 그림, 저자 소개 내용을 통합해 최종 편집본을 만들어 교신저자에게 확인하도록 한다. 이 확인 작업은 1주일 내로 해야 하며, 그로부터 1달 이내에 논문은 온라인에 선 출판된다. 투고, 리뷰 프로세스에 비하면 전광석화와 같은 프로세스다.
학술 논문을 출판해보니 왜 나의 멘토 교수님이 "박사 학위 논문은 일기"라고 했는지 완벽 이해할 수 있었다. 학술 논문 작성의 1차 관문은 내가 발견한 문제와 현상을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력 있게 작성하는 것. 2차 관문은 이렇게 공들여 쓴 글을 누군가로부터 신랄하게 평가받는 것이다. 이 과정은 특히 자존심 상하고 자괴감이 들기도 하고 워드 문서를 거들떠보기도 싫어지는 순간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런 순간들을 이겨내며 완성하는 데까지 끊임없는 자신과의 싸움이다.
학술 논문을 쓰는 과정은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다
학술 논문을 출판한다는 것은 적합한 문헌이 검토되었는가, 방법론이 올바르게 활용되었는가, 전반적인 글의 전개가 일관성 있게 논리적으로 전개되었는가, 학문과 산업에 대한 기여도가 있는지의 여부를 여러 학자들로부터 평가받는 과정이 수반된다. 그렇기에 정말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 한번 발을 딛고 견뎌 내다 보면 그 가치를 알게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하고 발전하는 나를 마주하며 뿌듯함이 더해진다. 한 단계를 디딜 때마다 알을 깨고 나오는 것과 같은 고통이 있지만, 나의 한계를 넘고 넘는 가치 있는 여정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지식의 틈이 메워지고 학문이 견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음을 알기에 학문적인 기여에 참여한다는 숭고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학술 논문을 출판하며 배운 점과 기억하고 싶은 점을 정리해본다.
01 논문 한 편으로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각각의 논문이 쌓여 학계의 흐름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것이다. 세상을 바꾸겠다는 허황된 생각은 금물이다. 주제는 좁히고 뾰족하게, 깊이 있게, 그리고 일관성 있게 작성해야 한다.
02 명확하고 확실한 표현으로 정확한 의미 전달이 가능하도록 작성해야 한다. 물 흐르듯 머릿속에 있는 내용을 나오는 대로 쓰는 것은 금물. 한 문장 한 문장, 단어 하나의 선정도 심사숙고하여 선택하고 작성한다.
03 리뷰어 평가서를 두려워하지 말고 즐기자. 좋지 않은 내용이면 기분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나의 성장과 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는 귀한 내용이다.
04 학술 논문 한 편이 출판되기까지는 여러 사람들의 자발적인 헌신이 있음을 기억하자. 에디터와 리뷰어들은 별도로 금전적인 혜택을 받고 일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의 업무를 하면서 학계 발전을 위해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내 시간을 쪼개서 누군가의 글을 읽고 비평하는 것은 보통 노력이 드는 일이 아니다. 이들의 노력에 감사하고 이런 분들이 있어 학문이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다.
01. 기존 문헌에 대한 깊은 이해도
어떤 연구가 진행됐고, 요즘 연구 트렌드는 무엇인지, 어떤 것과 궤를 같이 하고 어떤 것과는 다른 의견인지 파악
02. 신뢰성 있는 데이터로 나의 의견 뒷받침
연구 목적에 맞는 방법론, 연구 문제를 파악하는데 적합한 데이터 수집
03. 학문적인 글 작성(Academic writing skill)
장황하지 않은 표현,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누구나 읽으면 이해할 수 있는, 오해의 소지를 남기지 않는 문체
주장에 대한 근거, 설명을 함께 해야
01. 작성하여 투고(Write and Submit)
내 연구 분야와 맞는 저널 선정, 저널에서 제공하는 형식과 스타일에 맞춰 작성한 후 투고
02. 에디터 평가(Review process의 시작)
여기서 '출판 거부'되면 'desk reject'
03. 관련 분야 동료 학자 3-4명의 평가 (Peer review)
약 4-6주 소요. 경우에 따라 몇 개월 걸리기도.
04. 결과 통보
Accept: 수정할 것 없음
Minor revision: 오탈자, 문헌 1-2개 정도 추가 검토 및 추가(추가할 내용이 매우 명확하여 금세 끝낼 수 있는 간단한 작업), 수정 기한 1달 이내
Major revision: 글의 구조, 순서 변경 필요, 데이터 추가 수집 및 분석 필요, 검토 및 추가해야 할 문헌이 많은 경우에 해당, 수정 기한 2-3개월
Reject: 출판 거부
05. 기한 내에 재 제출(Resubmit)
기한 내에 수정하여 제출하면 3-5번의 과정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