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곳에서 경험하는 새로운 삶
2020년 1월부터 짝꿍이 하버드 의과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를 시작했다. 덩달아 나도 한국에서 하던 모든 일을 접고 보스턴에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
보스턴은 미국의 전통과 자유, 그리고 지성을 대표하는 도시다. 그에 걸맞게 보스턴에는 수많은 대학이 자리 잡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하버드, MIT (엄밀히 따지면 하버드와 MIT는 케임브리지에 있다, 보스턴 바로 강 건너 지역)는 물론이고 보스턴 대학, 노스이스턴, 임마누엘, 시몬스, 웬트워스 인스티튜트, 매스 아트, 서포크, 에머슨 대학 등등... 보스턴의 거리를 걷다 보면 학교 옆에 학교 옆에 학교가 있다.
이렇게 대학교가 많고, 한국에서 외국인 학생을 대상으로 경영학 과목 영어 강의를 5년간 했으니 미국에 오면 시간 강사 자리라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주 후 정착하면서 일할 수 있는 허가증(EAD_Work Permit)도 신청하고 차차 준비해야지 했는데, 이주한 지 2달 만에 팬데믹이 터져 버렸다. 락다운이 시작됐고 끝도 없는 집콕의 시간이 시작됐다. 매우 운이 좋게 EAD는 신청한 지 한 달만에 받았는데 무용지물이... 일을 찾지 못하면 하버드에서 제공하는 배우자 혜택으로 수업 청강이라도 하려고 했는데, 이것 역시 팬데믹으로 올 스톱됐다.. 이런 코로나.....!!
보스턴 정착 초반에는 집안일 및 짝꿍과 시간 보내는데 집중했다. 한국에 살 때 우리는 오랫동안 주말 부부였기 때문에 보스턴에서 같이 세끼를 챙겨 먹고, 함께 공부하고, 영화를 보고, 드라마 정주행 하는 것만으로도 신세계였다. 그러나 집콕 생활이 장기화되면서, 나는 집에서도 커리어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다행히 한국에서 컨설팅 업무 의뢰가 간간히 들어오고, 학술 논문 작성 및 리뷰도 하고, 백과사전 작업에도 참여하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는 기회가 생겨 독립 연구자의 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변하면서 국경과 시차의 경계 또한 무너졌다. 미국에서는 브랜딩 컨설팅 업무를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함께 일하던 파트너를 통해 업무 의뢰가 들어왔다. 브랜딩 전략 자문이나 네이밍, 태그라인, 시각적 요소(로고, 앱 아이콘 등)에 대한 평가 업무 등을 진행했다. 팬데믹으로 미국에서 기대했던 삶을 경험할 수 없었지만, 이렇게라도 컨설팅 업무를 할 수 있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2019년에 투고한 논문의 수정 작업이 2020년 9월까지 계속됐고, 내가 미국에 와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며 했던 작업이다. 또, '도시 브랜딩' 관련 논문 작성을 위해 미국 오기 전 2달 동안 브랜딩 전문가 11명과 진행한 인터뷰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시간도 가졌다. 수집한 데이터를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만도 수개월이 소요됐다. 이 외에도 '가상세계'에서 브랜드 공간을 디자인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 '증강현실'을 활용한 브랜딩 전략에 대한 연구도 진행 중이다.
2016년 첫 국제 학회에 참석한 후 내 인생 최초로 논문 리뷰어로 활동을 시작해 '브랜딩', '질적 연구', '호텔'관련 분야의 리뷰어로 참여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논문을 리뷰해주는 데에는 별도의 금전적 혜택이 없지만, 비금전적 혜택이 있다. 바로 이 과정을 거치면서 또 배우고 느끼는 것이 있다. 먼저, 하나의 논문의 오리지널 원고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 출판이 되는지를 간접 경험할 수 있다. 둘째로, 다른 리뷰어들의 평가서가 공유되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각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셋째로, 리뷰 작업을 하면서 리뷰어의 시각으로 논문을 비평하니 내 논문을 작성할 때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2022년 영국에서 출판 예정인 Tourism marketing and management 백과사전에 entry를 제출했다. 엔트리는 학술 논문보다는 깊이가 얕고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용어를 정의하고, 용어에 대한 설명과 관련된 최근 연구 동향, 앞으로의 전망을 포함해 1,500자 내외로 작성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은 6개 이내, 표나 그림은 1개만 삽입 가능하다. 학술 논문 작성에 비해서는 수월한 업무지만, 그래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보편적인 내용으로 작성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았다.
이것 역시 내가 참여하고 싶은 항목의 엔트리를 작성해 제출하고 peer review(동료 평가)를 거쳐 출판 여부가 결정된다. 내가 작업한 entry는 'Brand image(브랜드 이미지)', 'Case study(사례 연구)', 'Korean wave tourism(한류 관광)', 그리고 'Qualitative research sources(질적 연구 자료들)'이다. 한꺼번에 4개를 작성해야 해서 조금 벅차긴 했지만, 다행히 한 번에 통과했다. 백과사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였다.
한국에 있을 때는 격주로 진행하는 마케터 스터디에 참석했다. 열심히 참석해서인지 모임장으로부터 운영진 오퍼를 받기도 했으나, 미국에 오게 되면서 고사했다. 오프라인 위주로 진행되는 스터디라 안타깝지만 이주와 동시에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그러나 팬데믹으로 모든 것이 온라인으로 진행되면서 미국에서도 스터디에 참석할 수 있게 됐다. 코로나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 덕분에 업계 사람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국 시장의 트렌드를 캐치 업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 월간 매거진 <호텔 앤 레스토랑>의 기고자로 추천을 받았다. 당시에는 진행하고 있는 업무가 많아서 엄두를 내지 못했지만, 미국에서 정착한 후에 시간적 여유가 생겨 지원서를 제출했다. 편집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고, 2020년 10월부터 '정성연의 Hospitality Brand Talk'로 칼럼 기고를 하고 있다. 호텔과 레스토랑을 주제로 하는 매거진이므로 주로 호텔과 카페, 레스토랑 브랜드를 주로 다룬다. 그 외에도 특별한 이슈가 있을 때는 타 산업 브랜드 이야기도 다루고, 브랜딩 개념을 다루기도 한다.
매월 다른 주제로 A4 7-8장 분량으로 작성하는 일이 쉽지만은 않지만, 덕분에 내가 공부하고 연구하는 내용을 독자들과 나눌 수 있는 기회임에 감사하다. 칼럼을 읽고 개인적인 문의를 하는 독자, 긍정적인 리뷰 의견과 코멘트 덕에 동기부여가 된다. 또 오랫동안 연락이 끊겼던 업계 및 학교 선후배로부터 반가운 메일을 받기도 한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매월 작성한 칼럼이 차곡차곡 모여 벌써 16개나 된다. 칼럼이 조금 더 모이면 주제별로 묶어서 별도의 책으로 출판할 계획도 구상 중이다.
칼럼 작성을 하면서 다양한 브랜드를 발굴하고 조사하며 분석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케이스 발굴은 각종 채널을 통해 진행하기도 하고 직접 경험을 하면서 하기도 한다. 락다운 기간에는 주로 웨비나나 기사를 통한 발굴이 주를 이뤘지만, 락다운 해제 이후에는 직접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면 발품을 팔고 돌아다니며 발굴한다. 이렇게 발굴한 케이스는 블로그나 브런치에 1차적으로 정리해놓고, 칼럼에 소개해도 될 만한 것은 내용을 가다듬어 다시 작성한다. 발굴한 케이스 중 더 심도 있게 조사하고 싶은 내용은 내가 개발한 브랜딩 프레임워크에 접목하여 분석한다. 이 내용은 추후 내 연구 자료로 활용할 예정이다.
뇌공학자인 짝꿍 덕에 신기술과 제품에 있어서 얼리 어답터의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 살 때는 짝꿍에게 구글 스케치업을 배우고 직접 집 인테리어 디자인 도면을 그려 디자인 비용을 절감하기도 했다. 미국에 와서는 오큘러스로 메타버스를 체험하며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이 어떨지에 예측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다. 또 말로만 듣던 3D 프린터를 구입해서 직접 필요한 도구를 디자인해서 사용 중이다.
내년의 목표 중 하나는 'Python 공부하기'다. 컴퓨터와의 소통이 점점 중요해지는 시대에 컴퓨터와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며 프로그래머 출신인 짝꿍이 옆에서 계속 압박을 가하고 있다. 2020년 락다운 기간에 짝꿍에게 코딩하는 법 기초를 배우긴 했으나, 실제 생활에서 활용할 일이 없으니 금세 잊어버렸다. 내년엔 브랜딩과 관련된 간단한 기능을 코딩으로 직접 만들어볼 생각이다. 무엇이 될지 아직은 모르지만, 이렇게 계획을 할 때가 늘 가장 행복하다 :)
보스턴에서 2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2021년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그간 했던 일들을 정리해보니 이만하면 선방한 것 같다. 서울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고 지식을 전달하며 채움과 동시에 비우는 삶을 살았다면, 보스턴에서는 나만의 시간을 갖고 차곡차곡 채워나가는 삶을 살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업무들이 당장의 성과로 이어지는 활동들은 아니지만, 늘 그랬듯 이 경험들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어떻게든 내 인생의 자양분으로 활용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