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

by 징계
kt_0470_1.jpg 남은 시간

늦잠을 잤다. 부리나케 출근 준비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우리 집은 22층이었지만 이미 3명의 학생들이 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내려가며 거의 매 층마다 섰고,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등교하는 학생들이 올랐다. 이렇게 늦은 시간의 출근은 처음인지라 엘리베이터에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시간이 있는 줄은 몰랐다. 조바심이 났다. 엘리베이터 안의 몇몇 학생들도 핸드폰과 엘리베이터 층을 번갈아 보며 초조한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엘리베이터는 3층에서도 멈추었다. 문이 열리기 직전에 초등학교 3~4 학년쯤 되어 보이는 한 남학생이 말했다.


“아, 3층 정도면 그냥 걸어서 내려가지.”


꽤나 큰 목소리로 말을 했던 터라 3층에서 타려던 한 젊은 부부가 얼굴을 붉히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옆에선 다른 학생들이 킥킥 거리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는 그 남학생에게 말했다.


“좀 여유 있게 살아. 너희는 아직 시간이 많아.”


아마도 내가 말한 시간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는 부모로서 전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미국에서 유학을 했던 나는 ‘뉴욕 미닛 (New York Minute)’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다. 매우 짧은 순간이라는 이 단어는 바쁘게 사는 뉴요커들의 시간관념을 빗대어 만들어졌다. 하지만 그런 뉴요커들도 공과 사의 구분은 명확하다. 일과시간에는 정신없이 시간에 쫓기며 생활을 하다가도 일과시간 이후나 주말에는 온전한 여유를 즐긴다. 학생들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 입시는 성적 줄 세우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입시는 the best 보다 one and only로 접근해야 한다고 한다. 최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일성과 캐릭터라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네 학생들은 어떤가? 학교 종이 치는 순간, 모두 학원으로 간다. 9시경의 대치동 학원가를 본 적이 있으면 더욱 실감할 것이다. 교복을 입은 수많은 학생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있는 학원 버스, 부모님 차에 오르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표정은 마치 소금에 절여진 배추 같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여유 따위는 허락하지 않는 사회에서 살아가야 하는 엘리베이터 안의 아이들이 어린 시절이나마 여유를 가지고 살았으면 한다. 지금 우리 집에 있는 작은 아이 역시 여유 있게 살며 one and only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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