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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자

by 징계
sc_0603_1.jpg 뒤집으면

TV에서 군 장병들 얘기가 나올 때면 떠오르는 일이 있다. 내가 제대를 6개월 정도 앞두고 있을 때의 일이다. 우리 중대에 신병 4명이 들어왔다. 1명은 우리 소대에 3명은 타 소대에 배치되었다. 그들은 100일의 적응 기간을 마치고 휴가를 갔다. 그런데 복귀 날이 되었지만, 타 소대 신병 한 명이 휴가에서 복귀하지 않았다. 당시 우리 부대는 1개 중대가 한 막사(군인이 지내는 건물)를 쓰고 있었다. 3개의 소대가 한 지붕 세 가족처럼 살고 있었기에 다른 가족이었지만 타 소대원들과도 막역하게 지냈다. 그래서 그 친구 역시 내게는 그저 옆집 아이에 불과했지만, 꽤나 신경을 써 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소대에 배치받은 동기 신병에게 물어봤지만, 휴가 기간 동안 그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다고 했다. 우리 중대는 급히 수색팀을 꾸렸다. 그리고 나도 그 수색팀에 포함이 되어 부대 외부로 출동을 했다.


경기도 포천 일동 일대를 탐문하던 중, 중대장님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더니 수색팀을 한 모텔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우리는 이동 간 상황을 전해 들었다. 모텔 직원이 퇴실을 안 하는 군인이 있어서 방을 체크하는데 인기척이 없어서 마스터 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고, 거기서 그 미복귀 신병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신병의 사체를 발견한 것이다. 오랜 기간 부대 근처에서 숙박업을 했던 모텔 사장은 우리 부대 마크를 보고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부대로 먼저 연락을 취했던 것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헌병들이 먼저 와 있었다. 헌병들은 우리의 출입을 막았고, 신원 확인을 위해 중대장님과 소대장님들의 출입만 허락했다. 신원 확인을 위해 문이 열리는 순간, 그 신병의 모습이 살짝 보였다. 군복을 입은 채 화장실 문 앞에 앉아 있었다. 아니, 명확히 표현하자면 화장실 문 손잡이에 걸린 짧은 줄에 매달려 있었다. 추후 전해 들은 정황 보고에 의하면 손잡이에 끈을 묶어서 스스로의 힘으로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몸을 당겼다고 했다. 유서도 발견됐지만, 그 내용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많은 부대원들이 오랜 기간 조사를 받았다. 하지만 특별히 처벌을 받은 부대원은 없었다. 그리고 징계를 받은 장교들도 없었다. 유족들도 특정 인원에게 문제를 삼거나 처벌을 요구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부대 내에서 쉬쉬해서 그런 것 아닌가 의심했지만, 사단에서 내려온 부대 정신 교육 지침 내용을 보니 그건 아닌 듯했다. 단지 한 가지 변화는 한 지붕 세 가족으로 살던 중대원들이 중대 개편을 통해 새 가족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이다.


생각의 정리가 필요할 때나 홀로 여유를 즐기고 싶을 때 나는 보일러실을 통해 막사 위로 올라 지붕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헌병대 수사과에서 찾아와 우리 소대원들 개개인과 개별 면담을 한 날도 나는 지붕 위로 올랐다. 그 수사과장과의 대화에서 유추해 봤을 때, 그는 아마도 생을 마감하는 이유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내용의 유서로 남기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지붕 위에 누워 담배를 피우며 생각했다. 이렇게나 사려 깊은 생각으로 생을 마감할 줄 아는 아이가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나 자신보다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아이였기에 그러지 않았을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그는 외로웠던 걸까? 얼마나 힘들었으면 자신의 목숨이 다 할 때까지 목을 스스로 조일 수 있는 거지? 일어서기만 하면 살 수 있었는데. 왜 군복을 입고 부대 근처까지 와서 생을 마감했을까? 차라리 아름다운 곳으로 가지. 두서없는 의문과 사념들이 난무했지만 결론엔 도달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É. 뒤르켐(1858~1917)에 의하면, 자살에는 이기적 자살(利己的自殺)·애타적 자살(愛他的自殺)·아노미(anomie:無規制狀態)적 자살의 세 가지 있다고 한다. 이기적 자살은 개인이 사회에 결합하는 양식(樣式)서 과도한 개인화를 보일 경우, 즉 개인과 사회의 결합력이 약할 때의 자살이다. 애타적 자살은 그 반대로 과도한 집단화를 보일 경우, 즉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치게 강할 때의 자살이다. 아노미적 자살은 사회 정세의 변화라든가 사회환경의 차이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缺如)에 의한 자살이다.(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하지만 이런 어려운 말 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천재 조각가이자 화가인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파이널 포트레이트(2018)’ 에서 자코메티는 그의 친구이자 작가인 제임스 로드와 자살에 대한 대화를 가벼운 농담조로 나누는 장면이 나온다. 그 대화에서 자코메티는 자살에 대한 생각을 매일 하고, 한 번쯤은 해보고 싶다는 말을 한다. ‘내가 그런 용기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이라는 말과 함께. 하지만 내가 느낀 자코메티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살에 대한 용기를 자신의 삶과 예술에 쏟아부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죽음은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하지만 용기가 올바른 방향으로 발산될 때 삶은 더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내가 외로울 때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아닌 외롭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내가 힘들 때 죽을 수 있는 용기가 아닌 죽을 각오로 견뎌낼 수 있는 용기. 내가 아플 때 죽을 용기가 아닌 도움 받을 수 있는 용기. 내가 세상과 맞지 않을 땐 죽을 용기가 아닌 죽을 각오로 세상과 맞서 싸울 용기. 그리고 우리 삶 속의 무수한 감정들이 고작 과도한 개인화나 지나친 사회적 의무감, 사회환경의 차이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라는 몇 가지로 일반화시킨 가설로 해석하지 말라고 É. 뒤르켐에게 한마디 던질 수 있는 용기 말이다.


누구든 힘들 때 전화 주세요. 010-3239-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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