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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꼬치

by 징계
ls_0191_1.jpg 떠난 자리

어느 크리스마스 날, 나는 와이프에게 사소한 일로 혼이 났다. 그 덕에 아주 냉랭하고 서릿발 날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되었다. 5살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아들만 데리고 조용히 피신을 했다.


“아들, 우리 뭐 먹으러 갈까?”


“그래.”


“뭐 먹고 싶어?”


“뭐 치킨도 좋고.”


사실 아들은 먹는 것에는 취미가 없는 아이여서 아는 음식도 많지 않았다. 나는 소주가 당겨서 양꼬치가 어떠냐고 물었다. 좋단다.


동네에 가끔 가던 중국인이 운영하는 자그마한 양꼬치 가게로 들어갔다. 양갈비살 2인분에 온면, 소주 한 병, 그리고 환타를 시켰다. 양갈비살은 기름이 많아 굽기는 조금 까다롭지만, 부드러워 아이들이 먹기에 좋다. 나는 아들에겐 소주잔에 환타를 따라주고, 나는 소주잔에 소주를 따라 대작을 하기 시작했다.


“딩가딩가!” (아이랑 같이 짠, 또는 건배 등 성인들 음주 관련 단어를 쓰는 게 조금 신경 쓰여서 우리 가족은 술 마실 때 ‘딩가딩가!”라고 건배를 한다.)


“아들, 엄마는 아빠를 왜 자꾸 혼내는 걸까?”


“잘못하면 혼나는 거야. 유치원에서도 잘못하면 혼나는 거야.”


“응, 그래..”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다. 이런 우리 모습이 웃겼던 건지, 크리스마스에 선물 하나 들지 않고 아들과 술이나 마시는 내 꼴이 불쌍해 보였던 건지, 사장님이 딸과 같이 먹으려고 한 만두인데 맛있다고 아들에게 먹으라 하시며 물만두를 가져다주셨다. 몇 차례 술 한잔하러 가족들과 왔었던 가게였지만, 그전까지 사장님과 대화는 주문과 계산이 전부였었다. 그런데 이날 사장님은 우리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렇게 우리 가족과 양꼬치 가게 사장님 가족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 후 우리 가족은 더욱 자주 양꼬치 가게에 갔고, 두 가족이 같이 피크닉도 다닐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술이 진득이 취한 밤, 사장님의 인생사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었다.


사장님은 중국에서 아들을 홀로 키우다가 아들이 20살이 되고 독립을 하자, 홀로 한국으로 건너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식당에서 주방 일을 하다가 그 식당에 채소를 납품하던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생겼고,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 부모의 도움으로 작은 가게를 열 수 있었다. 이때부터 남편은 일을 하지 않기 시작했고, 술과 가정폭력이 시작되었다. 타지 생활에 더불어 고된 가게 일, 가정 폭력까지 너무 힘들었지만, 어린 딸을 위해 참고 견디어 왔다. 하지만 딸은 초등학생이 되자 가정 폭력이라는 두려움을 알게 되었다.


“엄마, 나 아빠 있는 집에 가기 싫어.”


딸의 한마디에 사장님의 세상은 무너졌다. 모든 힘든 일들을 견디며 딸과 함께 할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오던 마음은 쓰라린 먹구름에 잠겨 버렸다. 그날, 사장님은 딸아이를 안고 펑펑 울었다.


가게 주방 안쪽에는 두 사람이 간신히 누울 정도의 휴게 공간이 있다. 그날 이후, 그곳이 두 모녀의 집이 되었다. 그녀들의 생활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다. 가게 명의가 남편 부모 이름으로 되어있어, 남편은 가게에서 행패를 부리며 돈을 가져갔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기는 바람에 월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게다가 코로나19라는 재앙이 닥쳐왔다.


이렇게 힘든 와중에 우리 가족과 연을 맺게 되었고, 우리는 사장님께 작게나마 도움이 되고자 자주 가게에 들러 매상을 올려주었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사장님은 월세 내기에도 급급한 상황이 되었다. 하루는 와이프가 주방 안 작은 방에서 쪼그리고 공부를 하는 사장님 딸을 보고는 눈물을 글썽이며 내게 말했다.


“우리 어차피 자주 올 거니까, 100만 원 정도 선입금 해놓고 와서 먹자.”


월세나 이런 것들을 해결하려면 목돈이 필요할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엄마이기에 줄 수 있는 마음이다. 서로가 자식을 키우는 엄마들 이기에 마음이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큰 도움이 안 될지언정 와이프는 엄마로서 마음을 전하고 싶었던 거다. 나이가 들면서 돈으로 밖에 도움을 줄 수 없는 상황들에 많이 맞닥뜨리곤 한다. 마음이 돈으로 환전되어야 하는 세태가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것 또한 우리의 몫인 듯하다.


우리는 그 후로도 오랜 기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지만, 사장님의 주변 정황들은 결국 그녀들은 떠나게 만들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핸드폰으로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친했던 주변 가게 사장님들도 어떤 연유로 떠난 건지, 어디로 갔는지 알 길이 없다고 했다. 말 그대로 사라진 것이다. 너무도 궁금했고, 찾고 싶었지만 그만두기로 했다.


각자의 삶에는 선택이 있고, 그 선택은 존중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을 때에는 나의 선택을 어떠한 언어의 형태로도 상대에게 이해시키기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리고 누군가를 이해시켜야 한다는 그 상황 자체도 고통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힘든 시간 속을 걸어왔던 사람들에게 그 고통은 더욱이 이겨내기 버거운 일일 것이다. 사장님의 입장이 되어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우리에게 경제적으로나 심적으로 빚이 있는 상태도 아닌데 연락 없이 떠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유를 이해하고 존중해 주기로 했다. 다만, 아이돌 가수가 꿈인 사장님 딸에게 이 말은 꼭 전해주고 싶다.


“예지야. 힘든 시간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고, 삼촌 가족들 챙겨주고 즐겁게 지내 줘서 너무 고마웠어. 그런 밝고 고운 마음을 엄마랑 꼭 끌어안고 지켜나간다면, 아이돌이 되는 꿈은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거야. 삼촌이 멀리서나마 열심히 응원할게. 그리고 나중에 우리 다시 만나면 예전처럼 인형 뽑기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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