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란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과 나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지는 것중 무엇에 가까울까.
누구나 그 모두가 이루어지는 사랑을 꿈꾼다.
적어도 나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진다고 느끼는 것(-혹은, 그렇다고 착각하는 것)은 사랑의 시작이 될 수 있겠지만,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지의 여부는 사랑이 지속될 수 있는지가 문제가 되는 중요한 과제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가끔은 나 자신이 온전히 이해받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면, 그 때에도 사랑을 포기하게 되기도 한다.
이처럼, 시작한 사랑을 지켜나가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모두 다르기에.
보영은 아휘를 통해 자기 자신이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그렇게 응석부리고 상처를 주면서도 언제든 돌아오면 그가 자신을 받아줄 것이라고 느꼈을 것이다.그리고 자신 마음 가는대로 제멋대로 행동하면서도, 아휘만은 자신을 온전히 이해해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휘는 보영이 자신을 자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고 사랑해준다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아휘는 보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서 보영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였다.
보영과 서로를 원하는 시간 속에서 아휘는 진실로 행복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이해받지도, 상대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굴레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은 아휘는 괴로워했고, 외로워했다.(아휘의 강렬한 행복감과 함께 밀려오는 씁쓸한 외로움이, 영화에서는 열정적이면서도 쓸쓸한 탱고 음악으로 잔잔히 깔렸다. )
결국 사랑하는 만큼 더 노력했었던 아휘가 최종 관계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조용히 이해해주고 또 상대의 행동들도 자연스레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장위와의 관계를 시작할 마음의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해피투게더'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아휘와 보영의 시간의 대부분은 쓸쓸했다. 그들은 서로를 원하지만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도 나 자신이 상대에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서로가 없으면 마치 자유를 얻지 못할 것 마냥 함께 껴안고 탱고를 추다가도 서로가 있어서 숨막혀하는 나날들이 반복되었다.
영화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완전한 이별을 맞이한 후에야 해피투게더 노래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