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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봄 Sep 17. 2022

결혼이야기, 이혼하는 부부를 통해 본 사랑과 이별




처음에 보고 나서는, 결혼이야기가 아니라 이혼이야기 아닌가, 했다.

지금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야기구나 싶다. 다만, 사랑이 끝나 그들의 삶을 정리하는 과정이 이혼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구나 싶다.



돌이켜보니 영화의 의도대로 그 의도를 너무나 잘 표현한 편집들이 많았다고 생각된다. 특히, 처음 장면.

영화의 처음은 부부상담을 받는 두 부부가, 그들이 서로가 생각하는 서로의 장점이나 매력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처음에 상담가가 나와, 주인공에게 서로의 장점을 써보며 처음 사랑하게 된 때를 상기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한다. 정말로 그들은 장점을 써가며, 상대에게 사랑에 빠지게 된 점들, 상대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된 점들, 나아가 같이 살아가면서 알게 된 그의 소소한 장점이나 깊은 진가까지, 정말로 잘 '알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상대의 장점들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헤어지는 과정에서 그들의 깨어진 관계를 봉합하기 위해 그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서 그 장점 리스트들을 썼다는 점을 곧바로 인식하게 만들면서, 허무할만큼 차갑게 이별을 인식하게 만든다.



처음 그들이 서로의 장점을 읊으며, 그 장점을 보여주는 그 혹은 그녀의 모습들을 함께 배치하여 나타나게 한 것, 그것이 이 영화의 유일한 로맨틱한 장면일 줄은 그 장면을 볼 때는 몰랐다. 그리고 영화의 맨 마지막에 가서야 맨 처음 나왔던 그들이 서로가 생각하는 그들의 장점을 상기시키게 된다. 자신의 아이가 우연히 발견한 그 장점 리스트들을, 자신의 아이에게 읽어주면서. 이렇듯 영화 내내 천천히, 때로는 정신없이 지나갔던 그들의 이별의 과정이 완전히 다 끝나고 나서야 그들은 서로의 매력적이고 아름다웠던 점들을, 상기하게 된다.



그 아이러니가 너무 슬펐다. 그들이 이혼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던 서로가 가진 이기적이고 답답한 면들, 서로를 힘들게 했던 면들을 내가 다 지켜보게 해놓고, 완전히 그들의 관계가 끝나고 나서야 그들에게 '아, 이런 장점들이 있었었지..'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연출이었던 것이다. 끝난 사랑과 끝난 관계에 대한 허무함과 씁쓸한 마음이 밀려왔다. 너무나 익숙해진 사람과 관계, 그리고 먹고 사는 문제들로 찌들었던 일상 속 함께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동반자적인 관계, 이러한 관계속에서 잊고 있었던 그들의 사랑스러운 점들을 그 모든 관계를 정리하고나서야 똑바로 마주할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씁쓸했다. 그렇지만 그 또한 끝난 사랑의 자연스러운 결말이라는 것도 안다. 때로는 잘 맞지 않고 힘든 어떤 점들 때문에 관계가 끝이 나지만, 끝난 뒤에도 그가 가졌던 장점이나 따뜻한 점들은 그것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니까.




완전한 이별을 앞두고 남자 주인공이 술취해 자포자기상태에서 노래 부르는 장면이 인상깊었다. 노래 가사가 좀 역설적이었는데, 언젠가 누군가를 정말 사랑하면서도 헤어질 수 밖에 없음을 느낄때 느꼈던 그런 역설이 잘 표현된 것 같았다.

나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지만 그만큼 나한테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내가 가장 인정받고 싶은 사람이라 상대가 해준 칭찬과 평가가 나에게 가장 큰 용기를 주지만 그만큼 상대가 나에 대해 품는 실망이 나를 가장 무너뜨리는 힘이 있다는 것, 서로가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성장하고 있다고 느낄 때 인생의 가장 큰 동력을 얻었지만 원하는 것이 달랐다는 것을 느낀 순간 가장 큰 동력을 잃게 된다는 것.

가사가 정확히 이렇지는 않았지만 그런 심정을 나타내는 것 같았다. 그는 완전한 이별을 앞두고, 저런 가사의 노래를 하며, 스스로에게 조소를 짓는 듯 울부짖었다.






그와 그녀 모두 영화 내내 이혼하는 것에 대해 일종의 합의를 한 상태가 전제가 되어 이혼의 과정이 진행되지만, 서로를 물고 뜯으며 상처주려 하지 않고 '잘' 헤어지려고 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의도치않게, 나중에는 의도하여 서로를 깎아내리는 과정도 마주한다. 그런데도 동시에, 여전히 그들은 서로를 제일 잘 아는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각각 변호사를 데리고 합의하는 과정에서 잠시 쉬며 음식을 시킬 때, 아내인 그녀는 뭘 시켜야 할지 몰라 난감해하는 그 대신 음식을 시켜주는데, 그의 취향을 그보다 더 자세히 알고 이를 주문해준다. 그리고 길어져버린 그의 머리를 그보다 먼저 캐치하고, 자를 시간이 없다 하는 그를 위해 아들과 함께 머리를 손수 잘라준다. 이처럼 좀 웃기기도 하면서 어색한 상황이 자연스럽게 툭툭 튀어나오는 게 이 영화의 백미 중 하나였다.


 그들은 이혼하는 과정에서도 피터지게 싸우는 것만이 아니라, 이렇게 여전히 제일 잘 아는 사람으로써 자연스럽고 편한 사람들인 것이다..! 또, 여전히 상대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그동안 해온 노력이나 성과들을, 누구보다 기뻐하며 축하해줄 수 있을만큼 서로를 응원하고 아끼는 사람들인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이혼의 과정을 지켜보며 여자의 입장에서 더 와닿는 몇몇 내용들이 있었다. 감독이나 작가도 의도한 것 같은데, 단순히 이 영화 속 주인공 커플만의 문제가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 속에서 다루어볼 만한 문제들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던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게 이 영화의 매력 중 하나로 느껴진다.



모든 남녀와 부부가 다 그러하지는 않겠지만, 첫째로는, 상대의 취향이나 욕구 등을 더 섬세하게 파악해두고 이를 자연스럽게 표현 및 해소해주는 것은 주로 아내라는 점.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은 다른 일반적인 남자들보다 자상하게 나오지만, 그의 아내가 그러한 것처럼 상대의 취향 등을 섬세하게 파악해두고 이를 위해 '먼저' 해주는 행동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는다. 반면, 그녀는 머리가 길어져버린 그를 위해 그가 요청하지 않아도 먼저 머리를 잘라주고, 음식을 그의 취향대로 알아서 주문해준다.



둘째로는, 아직까지도 결혼생활에 있어서 엄마의 역할, 아내의 역할에 있어서 사회적으로 여자에게 다소 높은 기준이 있다는 점.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겠지만, 아직까지는 어떤 결혼한 여자가 가지는 역할(아내로서, 워킹맘으로서, 엄마로서)에 대해 사회적으로 높은 기준이 있다보니 이혼할 때에도 그것이 하나의 중요한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느껴졌다. 내가 느끼기에 감독이 그런 점도 꼬집고 싶었던 것 같다. 이혼의 과정에서 아이에 대한 주된 양육권을 누가 가져갈 것인가를 다투게 되어 아내가 변호사와 변론을 준비하는 장면에서, 아내는 자신이 해온 노력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솔직하게 가끔은 짜증나서 혼자 욕하기도 했고, 가끔은 집안일을 소홀히 했다'라는 것을 털어놓자, 여자 변호사는 그런 이야기는 절대 이혼의 과정중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못박는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남편은 조금만 아이를 잘 돌봐도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는 반면에, 아내는 조금만 책잡힐 일이 생겨도 좋은 엄마 타이틀을 빼앗기는 것이라며, 절대 솔직하게 말하지 말라고 일갈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모성애의 표상은 성모마리아와 같은 것이라며, 너무나 신성하게 여겨지기 때문에 오히려 여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고, 그것이 이혼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이 내용을 보며, 참 미국도 우리나라 사회와 같이 결혼한 여자들이 가지는 부담이 더 크구나, 이건 공통적인 과제와 같구나, 느꼈다. 심지어 나 또한 이 장면을 보며 돌이켜보니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다소 다정하고 자상한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자상한 아빠네' 라고 느꼈었고, 여자 주인공이 아들한테 그런 모습들을 보일 때에는 굳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한 것이라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결혼이라는 것을 마주하고 영화가 묻고싶은 것 중 하나라고 느껴진 것은, '결혼을 통해 신념이나 가치관을 상대에게 맞출 수 있는가'하는 점이었다.

이 영화에서 이 부부의 독특한 설정으로는, 대중문화 분야에서 떠오르는 스타였던 그녀가, 연극을 하는 그의 가치관과 연극 취향, 신념 등에 매료되어 한동안 그 분야에서 몸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 스스로 고백하듯그녀는 어린 나이부터 떠오르는 스타가 되었지만, 그 분야에 있어서 자기가 앞으로 어떤 예술을 하겠다는 뚜렷한 신념이나 취향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필요하다면 용기있게 도전도 할 줄 아는, 적극적인 배우였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남자는 뛰어난 극작가이자 연출가로,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무언가가 명확한 사람이었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 무대 전체를 끌고갈 줄 아는 능력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매료되어 그녀는 그가 몸담고 있는 연극 세계에서 그의 신념을 함께하기 위해 기존에 살던 지역에서 그가 살던 지역으로, 대중문화 영역에서 조금은 난해하더라도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연극 영역으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그녀가 고백하듯 그녀는 한동안 그의 세계에 속해있던 것이 행복했고 그런 메시지를 품고 있는 그가 자신의 감독으로, 본인은 그의 배우로서 일하며 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고 회고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녀 자신의 색깔이나 목소리는 낼 기회조차 없어지고, 그에게 인기와 명성을 가져다 주게 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녀가 이용당한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난 그의 세계로 옮겨간 것은 그녀의 온전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녀 스스로 회고하듯 그녀는 예술 분야에서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그 결과값이 없는 상태에서 그러한 것들을 가지고 있었던 그에게 반했던 것이고, 그의 그것들을 함께하겠다고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녀도 그녀 스스로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를 세상에 자신의 이름으로 내보이고, 그녀만의 목소리와 이야기를 표현하며 살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다만, 결혼을 하여 살아가다보면 부부가 각기 다른 신념을 가지게 될 수 있고 이것들이 부딪힐 수도 있으며, 그 때 경제적 여유 등 현실적으로 그 모두를 실현시켜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 생길 것이라는 점, 그럴 때는 어떻게 선택해나가야 할 것인지, 그리고 모두 실현하기 어려울 때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있을지, 그리고 내가 갖고 있는 어떤 신념이나 근본적인 내용 자체가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런 것들이 동일한 사람을 만나야만 하는 것인지, 하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바로 찾기는 어렵지만, 상대의 그것이 더 가치있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섣불리 상대의 그것을 따르겠다는 생각으로 결혼을 한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결혼생활이 힘들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어떤 이유가 됐던(상대의 그것이 더 '옳은' 것이라고 생각이 되든, 더 '멋진' 것이라고 생각이 되든) 내가 원하는 것과 추구하는 바에 대한 나름의 명확한 기준이나 판단없이 상대의 그것을 좇아 결혼하게 되면, 처음에는 그것이 나의 불완전함을 채워주는 것 같이 느껴진다 해도 어느 순간부터는 나 자신을 잃는 듯한 느낌까지 들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바, 세상에 내보이고자 하는 나의 목소리와 신념, 그리고 현실적인 문제로 타협을 하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내가 추구하며 살고자 하는지에 대한 기준들을 세우는 것이 중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 행복해지고 싶다는 마음에 나 스스로에 대한 연구 없이 나의 부족한 점을 채우기 위해, 상대의 멋있고 닮고 싶은 점을 본받기 위해 배우자를 선택하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다시한번 하게됐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우선적으로 따르게 하는 사람 또한 경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결혼도 나 스스로가 더 행복하고 성장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상대 배우자도 나를 통해 성장하고 행복하려고 결혼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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