칙칙하고 생기없는 공간을 보면 본능적으로 사랑스러운 그림을 채워넣고야마는, 사랑스러운 모드.
모드는 춤 추는 것을 좋아한다. 몸이 좀 불편하지만 춤출 때 행복함을 느낀다.
모드는 여러가지 무늬와 색깔로 꾸며진 옷을 좋아한다.
모드는 알록달록한 색감의 물감들로 그림을 그리고,
생기 넘치게 집을 꾸미는 것을 좋아한다.
모드는 어린아이같이 때론 부끄럽게 웃고, 해사하게 웃으며 장난치는 것도 좋아한다.
모드는 작은 사랑의 표현에도 감사함을 느끼고 행복을 느끼며, 작은 사랑의 표현을 할 줄 안다.
모드는 고집은 있으나 다른 이와 협상하며, 때로는 달래주며, 때로는 화를 내며 다른 이의 고집과 자신의 그것을 조절하는 데 능하다.
장애를 가져 몸이 불편한 사람이, 이러한 사람이라는 것에 약간은 이질감을 느낄 수 있다. 나 또한 모드를 지켜보다가 처음에 내가 이질감을 느꼈다는 것에 조용히 놀랐다. 나 또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새삼 느낀 것이다. 그들도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생동감있게 살고자 하며, 인간적 매력이 넘치는 사람들일 수 있다는 것을.
"모드의 마음 속 빛깔들을 애써 막아왔던 것은 무엇인가"
모드의 그림. 형형색색의 색감을 자주 사용한다.
모드는 그림을 잘그린다. 다른 이들보다 움직이는 영역이 좁아 그만큼 눈과 마음에 담아낼 수 있는 것들이 한정됨에도, 작은 공간의 집 속에서 세상의 여러 순간들을 더 예쁘고 맑게 담아낸다. 결국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화가가 된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기까지는 누구보다도 그 길이 순탄하지 못했다.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잠재력이나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주변인들(심지어 가까운 이들)이나 사회가 아닐까. 오히려 가까운 가족들은 그들을 보호해야 할 대상이자 책임감으로만 여기게 된다. 물론 다른 것들로부터 상처받지 않도록 보호하고자 하는 것 또한 사랑이지만, 그런 성격의 사랑을 이유로 하여 그 사람의 인생에 어떤 가능성도 두지 않으려는 것 또한 폭력임을 느꼈다.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더 견고하게 쳐 놓은 제한들을 넘어서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 자기가 잘하는 것들을 마음 가는 대로 해나가다 보면 다른 비장애인 일반 사람들이 매일 해나가는 것들보다 더 빛나는 무언가를 해낼 수도 있다.
영화 <내사랑> 속 모드와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의 나인틴 헌드레드의 삶
- 좁고 단순한 세계속에서 펼쳐내보이는 그들의 '다채로운' 세계
여기 피아니스트의 전설이라는 영화속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인물이 있다. 두 영화속 주인공은 모두 환경이나 삶의 조건(자신이 선택하지 않고 선천적으로 갖게 된 것)이 좁고 열악하다.
모드는 몸이 불편하여 행동반경이 좁고, 헌드레드는 배에서 태어나 배에서만 살아와 자신의 세계는 이 배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좁고 열악한 곳에서 살아왔음에도, 그 속에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창작물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비슷하다고 느껴 둘의 삶의 오버랩이 되었다.
둘 다 어떤 이유로든 다른 이들보다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좁아, 그에 따라 직접 보고 듣고 느끼는 경험은 적었다. 하지만 그들은 세상과 사람을 보는 섬세한 시선이 있었고 그것들을 대하는 예민한 촉수가 있었다. 그 시선과 촉수를 따라 풍부한 그림과 음악을 만들어내었다.
신기하지 않은가.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자가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의 감정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무언가를 연주해낸다는 것이. 다양한 친구가 없는 자가 스쳐지나가며 만나는 사람들의 특징을 포착해내어 그것을 누구보다 생동감있게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
헌드레드가 평생 배 밖으로 나가보지 않았지만사진을 통해 보는 것만으로 상상력을 펼쳐내어 그 공간의 느낌과 온기를 담은 음악을 만들어낼 때, 한 번 마주친 여자로부터 느낀 사랑의 감정을 그여자를 바라보며 피아노로 온갖 사랑의 감정을 표현할 때.. 정말 단순히 감동이다, 라고 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직접 겪어보지도 못한 것을 저렇게 표현해낼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일까. 단순히 타고난 감수성과 재능일까.
물론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난 예민한 감각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재능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느낀 어떤 울림을 자신의 손으로 옮겨내고자 하는 열정이 강했던 게 아닐까. 그 열정으로 자신의 삶을 지피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던 것도 같다. 그리고 한편으론,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것이 많아야만 다양한 감정과 삶을 표현해낼 수 있는 것만은 아니구나, 라는 점이 인상깊기도 했다.
모드가 달랐던 점, 자신의 삶을 사랑하고자 하는 '용기'
하지만 모드는 헌드레드와 달랐다. 결정적인 순간들에서 자신에 대해 더 용기를 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만의 세계를 일궈가기 위해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스스로 넓혀나갔다.
그녀의 세계는 이모의 집안에 작은 방 한켠이었는데, 자신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없다는 것과 그러한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모를 겪으며 그녀는 성인 남자의 집에서 들어가 살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그런 맥락 속에서 사랑 또한 선택했다. 자신의 결핍(먹고 사는 문제, 안정감)을 채워주고, 상대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삶을 스스로 선택해 그 선택을 옳은 것으로 만들어갔다.
물론 남자가 고집불통에 무뚝뚝하더라도 생활력이 강하고 따뜻한 면이 있음을 발견했기에 그 남자를 자신의 동반자로 선택한 것도 있었을테고, 그리고 그런 면에 점점 그녀 또한 사랑을 느꼈던 것도 있었지만, 그녀가 사랑한 것은 그녀를 둘러싼 세상인 것 같다. 그녀가 사랑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그녀만의 세상. 영화 <내 사랑>의 사랑은 그녀가 표현해내는, 표현해내고자 하는 그녀의 세상이라는 생각이다.
반면, 나인틴 헌드레드는 결국은 자신의 세상인 배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처음엔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의 세상 너머에는 어쩌면 사랑이 있고, 더 다채로운 세상이 있을테고, 그래서 더욱 더 다양하고 복잡한 질감과 온기와 감동을 담은 그의 음악을 펼칠 수도 있었을텐데..
그는 결국 그의 세계 밖으로 한 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두려움도 이해는 갔다. 그의 상상 속에서 마음속에서 펼쳐져가는, 그것을 손 끝으로 표현해낼 수 있는 음악만으로 이미 그는 만족하고 행복하며, 사람들 또한 그 속에서 행복했는데. 실제 다른 세계로 나아갔을 때 생각보다 그 감동이 미미하다면, 실망하고 말 것이라는 그의 두려움. 그러나 그 두려움을 한번만 극복하고 나아갔다면, 하는 아쉬움이 생각보다 굉장히 오래 여운으로 남았다.
그 '아쉬움'이 나에게 남은 이 영화의 의미다. 그렇게나 감동적인 연주를 할 줄 아는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가보지 못했다는 아쉬움. 그러니까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연주를 지켜보던 그 감동의 순간과, 결국은 그가 배에서 죽음을 맞이한 그 허무함의 순간이 동시에 면 자락에 남아버린 물감처럼 진하게 남아버렸다.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감동의 무언가를 세상 밖으로 꺼내보라는 것, 꺼내보지도 않고 자신의 세계에 갇혔을 때의 그 허무함을 느끼고 싶지 않으려면 결국은 표현해보라는 것, 별 게 아닌 것처럼 느껴질 수 있더라도 나만의 그 무언가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결국은 누구나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물감으로, 소리로 표현하는 것 밖에는 방법이 없지 않은가. 자신만의 그 개별적이고 고유한 그 무언가, 가슴을 뛰게 하는 무언가가 자신만의 무언가로 밖으로 나올 때, 의외로 많은 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감동을(따뜻함을, 위로를, 메시지를,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 개별성이 보편성이 된다는 이야기도 그런 맥락에서 나오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