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미국인데 차가 한 대뿐이어서 우리는 졸지에 세트처럼 붙어 다녀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물론 비자로 따지면 남편이 Primary인지라 나는 부록 같은 존재이지만, 부록은 어쩐지 동등하지 않은 느낌이 들어 세트라고 생각하고 다닌다. 여하튼 그런 연유로 남편이 학교에 나가는 날에는 나도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데, 남편이 연구실에 있는 동안 딱히 할 일이 없는 나는 학교 안을 어슬렁거린다. 캠퍼스는 상당히 넓어서 구석구석까지 가보지는 못하고 주로 남편이 일하는 건물이 위치한 캠퍼스의 중앙 구역을 돌아다니곤 한다. 오늘은 볕이 좋은 데다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학생들도 신이 난 듯했다. 이 날씨에도 웃통을 다 벗은 채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술판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을 보며, 역시 만국의 대학생들은 단결하여 노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 남편의 연구실이 있는 Klaus Advanced Computing Building. 이곳도 애플처럼 최초로 컴퓨터를 고안한 튜링에 대한 경의를 담아 무지개 색으로 계단을 칠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예쁘다. 한편 교내의 안내판은 누가 장난으로 그런 건지 철자가 한두 개씩 떨어져 나간 것이 많았다. 이 간판에는 t자가 빠져있다. 오래전에 소나타 자동차의 s자를 가지고 있으면 서울대에 간다는 괴소문이 퍼져서 한동안 길에 <onata>들이 무수히 돌아다녔던 우스운 기억이 떠오른다. 여기도 조지아 공대에 가고 싶은 누군가 부적처럼 떼어간 걸까?
캠퍼스 중앙에 있는 널찍한 광장 주변에는 푸드트럭이 여럿 있는데 그 앞에는 언제나 학생들의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걸 보아 값도 싸고 맛도 괜찮은 모양이다. 광장 앞에는 아인슈타인의 동상이 있어서 조지아텍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찾아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그런지 학생들도 동상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세계에서 세 번째 이자 마지막 아인슈타인 동상(나머지 두 개는 각각 워싱턴과 이스라엘에 있다고 한다)이라고 하길래 사진이라도 찍어보고 싶었는데 하필 옆에 사람이 있어 포기하고 돌아섰다. 한편 조지아텍 건물들은 우리가 흔히 미국의 대학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고풍스러운 건물들과 상당히 거리가 멀다. 공과대학이라 그런지 현대적인 디자인의 다소 딱딱해 보이는 건물이 많은데 고층 건물이 많은 애틀랜타 시내의 풍경과 묘하게 닮아있다. 음, 솔직하게 말하겠다. 안 예쁘다는 뜻이다. 조지아텍 학생들은 아름다운 학교 풍경에 정신 팔 일이 없어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을 것 같다. 얘들아, 열공하렴.
§ 학교의 벽에 그려진 여러 나라 문자로 쓰인 환영문구. 한글이 없어서 아쉬웠다. 요즘 대세는 한글인데 얘들이 뭘 모르네. 11월 중반인데도 학교에는 가을이 더디게 찾아오는지 아직 채 단풍이 내려앉지 않은 나무들이 많이 눈에 띈다. 저 멀리 보이는 고층 빌딩이 학교와 잘 어울린다.아래의 두 건물은 각각 도서관과 디자인관인데 다른 건물들도 대체로 저렇게 생겼다. 그러니까 안 예쁘게.
한참을 돌아다녔더니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파져서 학교에 있는 스타벅스로 향했다. 스타벅스는 교내에 있는 <Barnes & Noble> 안에 입점해 있는데, 서점 옆의 조지아텍 기념품 샵에서는 책 보다 더 많은 기념품들을 팔고 있었다. 기념품의 종류는 무척이나 다양해서 컵이나 텀블러, 의류에서부터 자잘한 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아, 그 와중에도 단 하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내가 고른 물건의 사이즈만 쏙 빠지고 없더라. 마음에 드는 물건을 고르려고 한참을 고민했는데 왜 그랬나 싶다.
§ 조지아텍 안에 있는 서점 <Barnes & Noble> 안에는 작은 스타벅스 매장과 서점보다 큰 조지아텍 기념품 상점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음에 드는 티셔츠는 결국 사이즈가 없어서 못 사고 추워지면 운동할 때 입을 티셔츠와 수면 양말만 집어 들었다. 서점에 간 김에 조지아 주가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경지라고 해서 찾아봤는데 1,000페이지가 넘어서 조용히 내려놓았다.
서점에서 들어봤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우선 도서관에서 빌려본 후 도전해 볼 만 한지 어떤지 가늠해 보고 나서 구입하기로 했다. 두께도 두께지만 백 년쯤 전에 쓰인 책이라 사용된 어휘들이 현대와 많이 다를 거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과거 일본어 원서를 읽었을 때의 경험으로 근대 문학의 난이도는 현대 문학에 비할 바가 아님을 잘 알고 있기에, 만일 도전하게 된다 해도 만만찮은 고행길이 되리라 예상한다. 그래도 애틀랜타에 있는 동안 이곳의 문학작품 하나 정도는 완독 하고 싶다는 무모한 욕심을 품고 서점을 나섰다.
파란 가을 하늘 아래서도 밋밋한 건물들 때문인지 들어버린 나이 때문인지 조지아텍 캠퍼스 산책은 그다지 낭만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캠퍼스라고 해서 꼭 낭만적이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나. 낭만이 없어도 좋은 산책이 되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나는 낭만스럽지는 않지만 즐거운 산책을 마치고, 마찬가지로 낭만스럽지는 않지만 함께 하면 즐거운 남편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세트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