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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Dec 20. 2021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배우는 민주주의

우리 마을과 이웃 이야기

어느 주말 오후 문틈으로 우편물이 하나 날아 들어왔다. 마치 해리 포터에게 날아온 호그와트 초대장처럼. 집 앞에 우편함이 따로 있어서 굳이 문틈으로 우편물을 넣을 이유가 없는데 뭐지 싶어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HOA(Homeowners Association)의 이사회 멤버 부부가 보낸 카드가 들어 있었는데, 입주를 환영하는 의미에서 작은 선물을 전달하고 싶으니 편한 시간을 회신해 주거나, 혹 코로나 때문에 대면이 꺼려지면 선물을 놓아둘 곳을 알려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산책을 할 때 오가며 마주치는 동네 주민과 간단히 인사 정도는 건넨 적이 있어도 누군가와 특별히 얘기를 나눈 적은 없는 데다 만나서 무슨 얘기를 하려는 지 알 수 없어 긴장되었지만, 일단은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고 그들의 방문을 기다렸다.


다음날 우리는 시간에 맞춰 방문한 이웃 부부를 맞이했다. 그들이 가져온 가방에는 쿠키와 귀넷 카운티 지도, 스와니 매거진, 공동관리규약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는데, 지루하니 책자들은 굳이 읽을 필요 없다며 한참 일상 대화를 이어가다 돌아갔다. 다행히 이웃은 비슷한 또래의 사람들로 아주 친절했고, 본인들도 2년 전에 캔자스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온 때문인지 타지인의 외로움을 잘 공감해 주었다. 방문 약속을 잡을 때 카드에 남겨 놓은 전화번호로 문자 메시지를 보낸 탓에 핸드폰 번호를 서로 알게 되었는데, 그 후로도 이웃은 문자로 필요한 것이 없는지 - 고맙게도 우리 짐이 도착하지 않았다는 얘기를 듣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지 말고 자기에게 빌리라고 먼저 말해 주었다 - 수시로 확인하며 안부를 물었다. 미국에 온 이후 처음 안면을 튼 이웃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 이웃 부부가 가져온 잡지와 지도들. 이들이 방문한 바로 다음날 뉴욕으로 여행을 가게 되어 함께 들어있던 쿠키는 아침식사 대신으로 요긴하게 먹었다. 우리가 뉴욕을 간다고 하니 집이 비어있는 동안 대신 봐줄 것이 없는지 먼저 물어왔다. 세심하고 감사한 배려이다.


한편 페이스북에 이 타운하우스의 그룹 페이지가 있으니 계정이 있으면 들어오라는 말에 별생각 없이 가입했는데 그 안에는 새로운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멤버인 페이스북 페이지에서는 타운하우스 정보나 문의는 물론 마을과 관련된 각종 논의들이 아주 활발하고 자유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근의 이슈는 쓰레기 문제였는데, 쓰레기 업체가 수거를 불성실하게 해서 업체를 바꾸느냐 마느냐의 논쟁이 한창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중간에 이사를 와서 아무것도 모른 채 미국은 쓰레기를 격주로 성실하게 가져가는 이상한 시스템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업체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여하튼 오랜 논쟁 끝에 쓰레기 업체는 새로운 회사로 교체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는데,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현재 업체가 쓰레기통 판매를 거부하는 바람에 또다시 한바탕 난리가 벌어졌다. 미국의 쓰레기통은 업체 소유라 회사가 바뀌면 쓰레기통도 수거해 가는 모양이다. 그런데 원래 업체가 기존 쓰레기통을 계속 이용할 수 있도록 싸게 팔기로 해놓고는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이다. 문제는 연말이라 새로운 회사에서 새 쓰레기통을 빨리 구해주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것. 놀랍게도 이 모든 과정이 페이스북을 통해 실시간으로 공유되는 한편 주민들의 의견은 신속하게 수렴되었다.


이런 일들이 나에게는 아주 신선한 경험으로 다가오면서, 오래전 대학을 다닐 때 독일에서 유학을 했던 교수님이 들려주었던 독일의 마을공동체와 지방자치 경험담이 떠올랐다. 당시 교수님이 머물던 곳의 이슈는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의 수질오염 문제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에도 주민들이 수시로 모여 의견을 나누고 방향을 정해가며 함께 해결책을 찾아나갔다고 한다. 그때의 주민회의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페이스북으로 공간을 옮겨 갔을 뿐 바탕은 동일하다. 주민이 의사결정에 직접 참여한다는 것. 물론 이런 일들은 마을이 소규모이기에 가능한 이기는 하다. 역시 민주주의는 소규모의 집단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대의 민주주의의 부작용을 일상적으로 겪어야 하는 한국의 현실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입 안이 씁쓸해졌다. 다가오는 선거에서는 누구든 유권자의 뒤통수를 때리지 않는 사람이 뽑히면 좋으련만.


이곳이 미국의 모든 마을을 대변하는 것은 아닐 테고 나의 경험은 극히 일부에 불과한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이 일을 겪은 후 나는 이 마을이 더 좋아져서, 밤 산책을 나간 김에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더 예뻐진 우리 마을의 사진을 찍어 간략한 입주 인사와 함께 페이스북에 올렸다. 고맙게도 많은 사람들이 환영해 주었고 만나고 싶다며 먼저 메시지를 보내왔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밥 한 번 먹자는 정도의 의미 없는 인사치레겠으나 그래도 환영받는 기분이 나쁠 리 없다. 그런데 가만 보니 페이스북에서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사람들 중 동양인은 아무도 없었다. 이 마을에 나를 포함해 동양인이 제법 거주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미국인들과 달리 동양인들은 어릴 적부터 공동체 운영에 참여했던 경험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도시가 아닌 이상 미국인의 대부분이 이곳과 비슷한 구조의 마을에서 자라왔을 테니 마을 내의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것이나 마을에서 필요한 일에 손을 돕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질 것이다. 반면 그런 경험이 없는 동양인들은 뭔가 어색하고 쑥스러워 목소리를 잘 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어릴 적부터 자연스럽게 겪어 온 마을 안에서의 작은 자치 경험이 성인이 된 후의 공동체를 대하는 태도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영어가 아닌 민주시민 교육이야말로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느낀 순간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우리 마을과 이웃의 이야기로, 어디까지나 나의 추측과 사견일 뿐 미국 전체가 어떤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다. 그래도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미국의 거대한 땅덩이와 적은 인구가 새삼 부러워진다. 새삼이 아니라 언제나 부럽다고 해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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