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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ug 13. 2021

코시국 나의 부아에 대한 의문

2021년 여름의 기록


뭘 하든 뜨뜻미지근한 나의 지금

기쁘거나 슬프지도 않아 그냥 멍하게 앉아있기만

집에 혼자 있는 거 좋아하지만

나도 답답한 건 참을 수 없네

끝내 터져 나오는 지겨운 신음

밖에 나가고 싶은데 나가기 싫은 기분에

이 비극에도 잘만 놀러 다니는 친구에게 심술 냈네

괜히, 짜증만 늘어가고 사는 낙이 없네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써 연말이 오네

환기가 안 되네 삶에, 창문을 활짝 열어도

오늘은 꽤나 맑네, 좋은 날씨가 그나마 위로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을 수 있을진 모르겠다만

그 사실을 애써 잊어버리고 사니까 난 조금 괜찮아


사라진 모는 것들에게(코드 쿤스트, 사이먼 도미닉, 최정훈)라는 곡의

사이먼 도미닉(쌈디) 랩 부분이다. 노래도 좋지만 특히 이 부분이 요즘 내 마음의 많은 부분을 대변하고 있어서 들을 때마다 뇌리에 콕콕 박히고 대리만족까지 하는 중이다.




코로나 이후에 90% 이상은 아이를 위한 외부 활동은 거의 안 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가끔 마트에 장 보러 가거나 밖에 산책을 잠시 나가는 것 정도 제외하곤 아이와 새롭거나 교육, 재밋거리를 위한 외부 활동은 거의 무에 가까웠다. 아이의 사회성이나, 외부 활동을 못하는데서 오는 나와 우리 부부의 스트레스보다 전염병으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어디까지나 내가 선택한 일이었다.


외식은 끊은 지 오래요. 맛에 진심인 나는 배달음식은 그전에 피자 치킨 외로 시켜 먹어 본적도 없고, 배달 앱조차 없었던 사람인데 배달 앱을 드나드는 횟수가 많아지나 싶더니 회원 등급이 올라가는 것도 경험하고 있다. 힘든 건 나뿐만이 아니고, 심지어 나의 스트레스와는 비교가 안되게 힘들게 일하고 계실 분들이 많은 걸 알기에 나의 크고 작은 쾌락과 경험을 위해 뭔가를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들을 가감 없이 포기해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주변엔 나와 일부의 민감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전부 잘만 놀러 다니는 것 같다.

모처럼 만에 남편이 오래 쉬게 됐던 때에도 우리는 제주도를 꿈의 섬처럼 아쉽게 바라보기만 했었고, 이번 여름휴가도 제주도는커녕 근처 서해바다에도 갈 생각을 못 했다. 집에는 온갖 자동차 장난감들과 슬라임, 물감놀이 등 집에서 할 수 있는 온갖 자극적인 장난감들만 넘쳐나고 있다. 그마저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슬라임과 함께 떡이 된 찰흙이 찢어진 소파 위로 덧대놓은 천에 지저분하게도 엉겨 붙어있다. 몇천 원같이 생겼지만 몇만 원이었던 소파 천도 그렇게 수명을 달리한 듯하다. 재생이 불가해 보인다.



이렇게나 저렇게나 나름 힘껏 시국에 집콕 생활을 많이 하고 있는데, 문제는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생기는 나의 쿨하지 못한 감정이다. 애 둘을 데리고 해수욕장에 놀러 갔다며 인증샷을 보내온 신랑 친구네 가족사진들을 보면서

아무 말도 안 했지만

솔직히 부아가 치밀었다.

이미 신랑 친구들 사이에서도 아이들 데리고 만나는 모임들에는 대놓고 가지 않은 게 두어 차례 돼서 나는 예민맘으로 찍혀있을 거였다.



주변에 나보다 더 집콕 생활을 유지하는 친구 Y의 사정도 만만치 않다. 회사 하계휴가 일정을 두고 팀 내 직원들이 이번 휴가엔 뭘 하느냐를 주제로 얘기를 하는데, 제주도를 가니, 서핑을 하니 마니, 풀빌라에 가니 마니 난리가 났더란다. 이미 그 친구도 자의적으로 쉬는 날 집콕으로 유명했던지라, 한 직원이 Y를 두고 'Y는 집순이라 이런 고민 안 해도 되겠다~'라고 했다던데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더라면서 분을 표출했다. Y는 진심으로 사람 많은 곳을 즐기는 외부 활동러였다. 그 아이는 명동 한복판을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지치지 않는 아이였고, 백화점이고 쇼핑몰에 데려다 두면 정말 100바퀴도 돌 수 있는 사람이었다.


Y랑 신랄하게 울분을 주고받고 나면 늘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나만 예민한 건가? 아니, 나만 노력해?

나는 안가고 싶어? 내가 미련한 건가?


그러다가, 이게 맞나 싶었다.

내가 왜 어쩌다 아무 감정 없는 사람들을, 심지어 좋았던 사람들을 대상으로도 그 현상만 보고 부아가 치밀어야 하고, 자발적 선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따위 야박한 생각을 하고 앉았어야 하는 건지.

저마다의 스트레스는 다들 있으니, 놀러 간다고, 즐기러 간다고 하는 그들을 보며 맞장구는 쳐주지 못하고 거의 묵묵부답에 가까운 반응으로 일관했지만, 그 때마다 지금처럼 속으로 엄청난 딴생각을 하고 있는 이중인격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틀린 것 같진 않은데, 야박하고, 이중적이며, 아무튼 이런 태도가 딱히 맘에 드는것도 아니었다.


이러다 가끔 '아 모르겠다, 나도 갈래.' 하고서 아주 가끔 꿈을 꾸었다. 여행은 둘째치고 외식을.

맛도 있고, 설거지 따위 필요 없고 물론 상차림, 치움 모조리 필요 없는 그 외식을 꿈꾼다. 하루 확진자 발생 수가 2000명대를 거뜬하게 넘은 지금 그런 꿈 따위 1초 만에 접었다. 혹시 모르는 거지만 여태껏 내가 지켜온 집콕 생활이 단 한 번의 그 외식으로 코로나 감염이 되어 먹칠이될 순 없었다. 그보다 더  억울할 순 없을 것 같았다.

티는 안내지만, 종종 다른 사람들을 의심하기도 한다. 저 사람 어디 갔다 온 거지, 마스크 왜 안 쓰지.

반대로 저 사람들이 날 의심할까 봐 괜히 시답잖은 말이라도 언제 얼굴봐요 라는 말은 쉽게 먼저 꺼내기가 어렵다. 길을 가다가도 괜히 마스크만 코와 양볼 옆을 꾹 한 번 더 조여준다.


그러던 중,

며칠 전 밥을 먹다가 우연히 벌거벗은 세계사라는 tv 프로그램을 봤다. 아마 거의 끝나가는 즘이었는데, 미국 대공황과 그것을 이겨냈던 시절을 주제로 강의가 이어지고 있었다. 짧은 강의였겠지만, 그 속에서도 대공황 시절 사람들의 모습은 고단하고 처절해 보였다. 그런데 교수님이 마지막에 던진 말이 나 자신을 좀 건드렸다. 그 교수님이 미국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기말 리포트로 학생들에게 주변의 할머니나 할아버지 등 대공황을 겪어내신 분들의 인터뷰(당시 상황을 듣고 녹취)를 해오는 것을 냈다는 것이다. 그 숙제를 읽어보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그 처절했던 대공황이지만, 지금을 사시는 그 어르신들이 미국 대공황 시기를 기억하며 많이 하신 말씀이

"Good Old Days"

였다고 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좋.았. 던 옛날 그때 그 시절"인 것이다. 이에 패널들의 반응은 나와 같았다.

"읭?"

교수님은 이어서 얘기했다.

미국 역사상 최악으로 어렵고 가난한 순간이었지만 그 시절을 왜 좋았다고 말했을까.

가장 어려웠지만, 가족이 하나 되고, 이웃이 하나 되고, 어려웠지만 서로 의지하고 함께였기에 극복할 수 있었던 고난이라고. 이어서 우리도 지금 코로나19로 상당히 어려운 시기를 지내고 있지만

"Stick Together."

"함께 이 시기를 극복했으면 좋겠습니다."


라며 강의는 마무리됐다.

나의 모습, 나의 마음은

과연 Stick together였던가. 너무 아니어서 자괴감도 들었고, 그런데 또 완전히 내 탓은 아닌 것 같아 먼저든 자괴감과 죄책감에 의문도 들었다. 방역수칙을 지키니마니 하는 것들에 빈정이 상하고, 백신을 맞네 안 맞네 불안해하고, 맞고 나서도 불안해하고, 그러다가 무탈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들에 감사하기도 하고. 우울했다가 화가 났다가 그러다 감사하기도 하는 것의 반복이랄까.

혼란한 시기임에는 자명한 와중에, 어떤 길이 모두가 Stick together 할 수 있는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한 번쯤은 생각해 보고, 이왕이면 나 혼자의 마음도 좀 넓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전에 코로나 시국이 해결됐음 더없이 좋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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