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서 니네 아빠같이 작업복 입고 다니는 남자 만나기 싫으면 공부 열심히 해야 돼.”
10대 내내 지긋지긋했던 말이었다. 작업복 입은 남자의 (전) 부인이자 내 엄마가 한 말이었다. 사실 횟수는 가끔 이었겠으나, 그 몇 번이 지긋지긋한 게 된 만큼 임팩트가 큰 탓인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언제부터 들었는지 모를 만큼 어렸을 때부터 들은 얘기였다. 저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수긍하진 않았지만 이상하게 불편함을 머금은 무표정으로 함구했다. 그게 전부였다. 그러고는 곧, 마치 이런 성적을 받는 나도, 그런 성적을 받다가 작업복 입는 남자를 만나기라도 하면 죄인이 될 것 같았다. 그러다 보니 의욕과 관심사가 자유 분방한 것에 비해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공부를 하고 행동하는 날들이 많았다.
우리가 사는 이 집이, 우리가 걷는 도로가, 우리가 먹는 음식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은 것들이 작업복 입은 사람들의 손길이 없었다면 있을 수 없었다는 걸 엄마는 알았을까. 어차피, 알았어도 엄마는 그렇게 말했을 거다.
다행히 나는 이성을 만나는 기준에 작업복 입는 남자는 안됨, 이라던가, 양복이나 제복을 입는 사람일 것이라는 제한을 두는 여자로 크지 않았다. 오히려 멀끔한 수트를 차려입고도 도대체 주체할 수 없는 양끼나 사치끼가 흘러나온 사람들을 경멸했다.
성인이 된 나는 엄마의 바람과 달리, 무려 작업복 입는 남자와 결혼했다. 아빠와는 다른 남자이나, 작업복이라는 면에서 같은 옷을 입고 출퇴근하는 남자라는 건 분명했다. 그 남자의 작업복을 보고 있자니 가끔 그렇게 아빠를 싸잡아서 얘기했던 엄마가 종종 생각났다.
남편의 작업복을 보며 드는 마음을 말로 하지 않는 건 당연했다. 다만 무언의 생각조차 바른 생각이 아니란 걸 잘 알았고, 여전히 나를 괴롭게 했다. 잔불을 덮듯, 주변을 흩트리듯 일부러 잊었다. 그렇게 잊고 사면되는 줄 알았고, 나만 되풀이하지 말자고 주문하며 더 자주 잊었다. 그러나 이미 타버리고 까맣게 재만 남은 산에서도 여전히 남아 연기를 피워 올리는 잔불은 언제 다시 타오를지 몰랐다.
“너도 저렇게 작업복 입고 다니는 남자 만날래?!!!”
재속에서도 피어오르는 잔불처럼, 엄마는 어쩌다 수틀리는 날에는 더 짧고 강력하게 말했다.
수틀리는 일이란 보통 내 성적표가 엄마 마음에 들지 않을 때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못 본 성적도 아니었었는데. 나는 공부를 전혀 하지 않고 시험을 봤을 때도 평균이 70점대 밑으로 내려온 적이 없었다. 백점이 아니면 백점이 아니라서, 어떤 게 백점이면 만점은 아니어서, 25문항 중 24개를 맞히고도 하나가 틀리면 하나를 틀려서 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잊기와 함구가 특기인 사람으로 살았다. 그러다 최근 한 고깃집 사장님이 SNS에 올린 글을 읽었다. 최악의 손님을 두고 넋두리하는 글이었다.
“아들, 공부 안 하면 이 삼촌처럼 고기 굽는다-”
손님은 고기를 구워주는 자신 앞에서 자식을 두고 저렇게 말했다고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는 거고, 또 그런 생각을 사람 앞에서 말할 수 있는 거냐며 나 역시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대한민국이, 세상 전반이 아무리 편해져도 인간은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는구나. 생각보다 인간은 별로,라는 말이 맞긴 하구나. 했고. 나는 또 한 번 희망보다는 수긍과 포기를 택하고 싶어졌다.
그러다 엄마 생각이 났다. 사장님 앞에서 사장님을 욕보인 그 손님이나, 자식에게 자신의 남편이자 무엇보다 자식의 아빠인 사람을 욕보이는 것이 큰 차이가 없어 보였다. 둘 중에 어떤 쪽이 더 잔인하고 창피한 것인지 견줄 수 없어졌다.
아빠의 작업복은 우리 집에서 그렇게 자주 죄가 되었다. 그때마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고, 무조건적인 수긍은 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내게도 작업복에 대한 편견이 안 생겼다고 볼 수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드는 생각을 여전히 발설하는 일은 없지만, 그 무언 속에 스치는 생각들을 보면서 나쁘다고 생각했다.
마치 나는 편견이 없는 사람인 척하는 누구보다 편견 있는 사람이었다.
이를테면 이른 아침부터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현장일과 사무일을 동시에 하다 일주일만의 저녁에 집에 온, 작업복을 입은 남편을 보고 생각했다. 짠하다는 생각이었다. 저 상의가 작업복이 아니고, 양복이었다면 남편의 저 좁고 처진 어깨가 수트각에 가려져 덜 쳐져 보였을텐데라고 짚었다.
딱히 일할 때 입는 복장이 꼭 양복이나 칼각이 잡힌 어떤 옷들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그놈의 작업복'을 입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면 나도 모르게 가지곤 했던 짠함을 '거두어들이는 노력'이 필요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나부터도 부끄러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죄인이 아닌 죄인과 사는 게, 죄인이 되지 않기 위해 사는 게 익숙했던 나는, 성인이 됐는데도 도통 죄책감이 꼬리를 물고 놓을 줄을 모른다. 차라리 내가 꼬리라도 열 개 달렸다면 억울하지도 않을 것을. 그래서 나는 꼬리 짧은 곰, 그러나 여우와 달리 맹수인 곰, 과의 내가 말한다. 작업복을 입은 아빠, 작업복을 입은 남편, 고기를 굽는 사장님, 성적이 낮은 딸, 만점이 아닌 딸, 1개 틀린 딸, 그 어디에도 죄인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