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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Feb 07. 2023

무탈한 날은 그걸로 끝내자 제발

다양한 불안 극복기

*

마음이 급하다.

육아가 시작되니 변수가 많아지고, 자유 시간의 소중함을 더 알아 버린 탓일까. 요즘의 나는 아이가 아픈 등의 변수가 없는 무탈한 날의 자유 시간에 조차 마음이 급해졌다. 집안 정리, 청소, 설거지, 빨래도 해놓고, 글도 쓰고 싶고, 공부도 해야겠고, 10분 운동도 해야 하고, 은행도 들릴 수 있으면 좋고, 책도 읽어야 하고,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이 넘쳐난다. 매일 밤 자기 전 눈을 감고 다음날 해야 할 것들에 대충 순서대로 계획을 세워보지만 그마저도 조심스럽다. 이렇게 설레발치다 다음날 아이가 아프기라도 하는 변수가 생길까 봐서다. 그냥 무탈하게, 세부 계획은 없이 시간이 주어지면 그때 가서 하나씩 해가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최근엔 아이가 많이 아프지도 않고, 어린이집에 가지 않겠다고 땡깡을 부리지도 않고 하루가 시작되는 평범하지만 큰 감사의 날들이 이어졌다.


 그렇게 무탈한 하루는 아침의 분주함과 빠듯한 출석으로 시작됐다. 부지런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런대로 건강하게 시작을 하고,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들을 해나간다. 그렇게, 살고, 좋기만 하면 될 것을. 하면 할수록 조바심이 난다. 하나라도 더 빨리, 하나라도 더 하고 싶어서, 해낸 것에 대한 성취는 무시하거나 무뎌지고, 자꾸 못하는 것에 대한 안달이 커졌다.


도대체 나는 왜 이러는 걸까요.

출처. 개그콘서트 불편한진실


그러다 심심풀이로 즐겨보던 넷플릭스 미국 드라마 시리즈 "Never I have ever"에서 나오는 핫가이 팩스턴의 모습에서 묘한 공감을 얻었다. 팩스턴은 셔먼오스크고등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는 Hot Guy. 인기쟁이 개쿨남인데 수영부 주장이라 몸도 짱이지만, 공부와 거리가 멀다. 반면 주인공 데비는 핫, 쿨걸을 지향하는 만큼 그렇지 않고 그 와중에 공부는 놓치지 않는 야심 찬 학생이다. 데비가 팩스턴이랑 잘 돼 가는 것을 바라면서도, 그녀의 심적 성장을 그리는 드라마다. 선생님 추천으로 데비는 팩스턴의 공부 멘토가 된다. 팩스턴에게 지은 빚이 있던 데비는 처음엔 그저 팩스턴의 숙제들을 대신해주는 정도만 하지만, 중간에 현타를 느낀 팩스턴이 데비에게 자신이 직접 공부를 하고 시험을 쳤을 때 잘할 수 있도록 진짜 공부를 가르쳐 달라 한다. 생전 공부와는 거리가 멀었던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공부를 이어간다. 그렇게 팩스턴은 쌩공부를 시작하고서 처음으로, 시험날을 맞이한다. 기분 좋게 앉은자리에서, 객관식이 아닌 단답형 시험지를 보고 패닉에 빠진다. 그냥 당황만 하면 괜찮을 건데, 그 순간 당황하고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며 고개를 돌려 다른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시험지에는 정답 하나를 써보지 못한 채 교실을 나가버린다. 뒤에서 같이 시험을 보고 있던 데비는 실의에 빠져있는 팩스턴에게 찾아간다.

넷플릭스 never i have ever 드라마 팩스턴과 데비



무슨 일이냐고 걱정하며 묻는 데비에게, 자기도 모르겠다고. 미친 것 같다고. 이어서 자기가 왜 이리 찌질한지 모르겠다며 짜고 있는 우리의 쿨가이 팩스턴. 이어서 수영대회에서도 떨렸기는 마찬가지였다고 말한다. 그래도 수영은 막상 물에 들어가면 괜찮았다고. 자기가 그걸 잘할 줄 알았기에 그랬던 것 같다고. 그렇지만 역사시험은 아니었다고 망했다며 쭈구리가 되어있다. 이에 데비는 시험도 잘 볼 수 있다고. 연습하면 된다며. 오히려 공황발작을 일으킨 게 다행이라고 말한다. 너에게 지금 공부가 의미가 있고, 중요한 것이기에 그런 것 아니겠냐며. 이에 팩스턴은 공감받고 깨달은 듯 인정하며 기분이 이상하다고 한다.


지금 내가 느끼는 너무나도 불필요해 보이는 불안도 차라리 다행인 걸까. 뭔가 어려운 걸 시작하고 마주해 나가고 있다는 증거고 과정인 걸까.


잘하는 것, 그래서 더 익숙해지고, 더욱 잘하게 된 것을 해나가는 것은 쉽다. 행여 과정이 어려울 수 있어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조차 알아서 긍정적으로 만들어져 있기에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조차 수월할 테다. 그렇지만, 못하는 것, 도무지 정답이 뭔지 모르겠는 것, 잘하고자 시작은 했는데 말 그대로 시작인 뿐인 것. 눈에 보이는 성과는 당장 보이지 않는 일들은 어렵고, 어색한 것이 당연하다. 때에 따라서 오히려 잘해보겠단 시작이 초반 어느 순간까지는 좋다는 인상을 줄순 있지만, 좋은 결과나 더 잘해보겠다는 욕심이 드는 찰나에는 팩스턴처럼 일정 수치 이상의 불안이나 당황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잘해보려고 했던 거는 하루에 주어지는 내 시간을 부지런히 쓰겠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무탈을 바라는 심리 이면에 있던 불안을 이겨내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도무지 어려워 보이는 일이 아닌데, 어려운 일이었나 보다. 기본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잘해놓고도, 남은 시간을 '더 잘'해내는 일은 언뜻 보면 정신력만 있으면 쉬운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냥 쉬기'에도 급급했고, 그 마저도 맘 편히 못했던 나에겐 익숙한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육아와 관련한 어떤 일이라고 능숙하고 익숙한 것도 없었다. 모든 일과, 사람과, 관계, 생각, 모든 것이 느린 사람이었다. 나는. 이렇게 낮은 사람이다.


 나도 모르게, 빠른 시간 안에, 한 번에, 그리고 더 잘 해내야겠고, 그 잘하는 것조차 익숙해지겠다는 욕심이 생겼다. 무탈한 하루들이 이어지던 요즘, 내 시간도 꽤 부지런히 지내고 있었는데, 이미 하고 있는 일들에 좋고, 잘하고 있다는 생각, 만족감은 잠시였다.


 부지런하게라는 것, 그것조차 자연스럽게 시간과 나를 대하는 것은, 느리고 게으른 나에게는 팩스턴의 공부만큼 어렵고 익숙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익숙하지 않은 일에 익숙해지는 것, 빠른 시간 안에 잘 해내겠다는 것만큼 가냘픈 속셈도 없. 멀리 보고 느린 대로 기본에 익숙해나가 보기로 한다.



 오히려 겨우 집안일을 해내고, 그저 쉬기 바빴을 때는 없던 감정인데, 잘하려고 시작하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조바심이 든다. 괜찮다고, 무탈하지 않았냐고, 조금씩 해나가고 있지 않냐고, 멀리 보라고, 감사한 하루라고, 스스로를 토닥여보지만 이런 식으로 애쓰는 마음조차 같잖기도 하다. 마음과 행동을 잡으려고 책도, 성경도 읽는데, 실천도 하는데 때때로 반대로 가는 마음이 이상하고 싫어서, 같이 책을 읽는 친구에게 조언을 구했다.


 아마 수험생 때의 마음과 비슷한 거 아니겠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생각지도 못했는데. 공부도 그렇지 않은가. 아예 공부를 하지 않으면 불안 자체가 없다. ( 잘하든 못하든 그래도 10대 시절은 공부를 해왔지만, 정작 대학 때 공부를 완전히 놔봐서 공부 안 한 자의 평온함을 안다.) 틀려도 그만 잘하면 땡큐. 그런데 공부에 열과 성을 다하는 순간 오히려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1등은 해본 적 없지만 하물며 전교 일등도 그런다지 않는가. 1등을 놓치면 어쩌지.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고.

시작했고, 열을 올리기 시작한 상태이기에, 우리가 읽고 있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우리는 그냥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어떻게든 불안을 느끼는 일반인인 것 같다고.


 어떤 양상의 불안이든 때에 따라서 자연스러운 과정일 수 있나 보다. 지금 느끼는 과정의 불안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인 걸까 생각만 해본다. 그냥 여전히, 꾸준히만 해보기로 한다. 결론이 나지 않았고, 여전히 물음표기에 그냥 글도 이대로 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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