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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해연 Aug 16. 2023

가족, 여행

시작은 미약하지만 끝은 따뜻하리


가족, 여행을 합치면 가족여행이 된다.

나에겐 가족도 여행도 왠지 어색한, 혹은 익숙하면 안 될 것 같은 게 있다. 가족도, 여행도 그런데, 가족여행은 오죽할까. 그런 내가 나와 한 남자, 그리고 작은 한 남자가 추가된 가족을 꾸리고 나서는 가족여행이라는 걸 한다. 가족도, 여행도 소중하고 좋은 것이란 걸 알지만, 그렇다고 목매일정도로 간절하진 않다. 혹은 간절하지 않다는 말 뒤에 두려워하는 무언게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선뜻 가족여행이라고 불릴만한 먼 길을 선호하지도 추진하지도 못하고, 또 않는다. 한편, 가족 여행이라기엔 거창하지만, 가족이 함께하는 나들이가 익숙한 큰 남자 덕분에 나도 이제, 가족이란 이름으로 새롭게 이곳저곳을 떠나본다. 용기를 더하고 두려움을 숨기고.

 

인파를 멀리하고, 인싸감성에도 거리가 멀다는 부부의 공통점을 기반으로 이번 여름에도 소소하게 조금씩 일상을 떠나봤다. 칠월의 어느 날에는 아이와 처음으로 천안에 있는 대형물놀이장(보통 워터파크라고 하지만 웬만하면 한글로 쓰려고 한다.)에 다녀왔고, 월요일을 낀 이번 주말에는 충남서산에 있는 춘장대 해수욕장엘 갔다. 모두 1박 2일 씩이었다. 둘 다 당일치기가 가능한 거리였는데, 거기선 또 내가 꼭 숙박을 원했고 이루어졌다.

 

이렇게 나와 남편, 아들로 이루어진 가족이 나들이나 여행을 갈 때마다 느끼는,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 지극히도 당연하고 평범한 여정에서 누린 지독히도 편안하고 극적인 행복감과 편안함 말이다.


이제서야.

비로소 편안하다는 생각이.

때론 너무 편안해서, 지금 나는 엄마라는 타이틀이 큰 위친데, 가끔 기존의 똘끼충만한 내가 되기도 하고, 급기야 아이의 아빠가 내 아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그 똘끼를 보고 ‘도대체 뭐(~길게 빼줘야 함)하는 거냐?’ 며 혀를 끌끌 차면서도 손은 이상한 날 찍고 있는 남편을 보고 재밌고 즐거웠다.

똘끼충만 엄마랑, 괜찮은 아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결과적으로 ‘좋다’를 필두로 하는 장하다, 행복, 감사 등 긍정감정이 크게 따르는 행위였기에 매번 이 주제로 글을 써보고 싶었다. 가족여행이라는 단어 말이다.

 

지금 나와 살고 있는 가족 말고, 내가 있게 한 가족에서 여행은 별로 있었지도 않을뿐더러 짧은 데나 먼데나 결코 좋은 적이 없었다. 아니 좋다 싫다를 논하기 전에 불편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이렇게 말한 이유가 있다. 실은 나는 다 좋았는데, 좋으면 안 될 것 같았고, 좋아도 그렇게는 좋지 않은 척했고, 어떤 날은 반대로 안 좋아도 좋은 척해야 할 것 같았고, 또 어떤 날은 아예 좋을 수 없어서 눈과 귀를 막고 싶었다. 숨을 곳이 있으면 숨고 싶었을 것이다. 앞문장의 많은 좋다에 즐겁다나 행복하다를 넣어도 되겠다. 나는 분명 좋거나 즐겁거나 행복하거나, 셋 다 일 수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건 다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다 엄마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혹은 지금까지 늘 엄마를 탓하고, 원망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이건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엄마가 함께하는 가족여행은 늘 그랬다. 어쩌다 막상 엄마가 끼지 않는 아빠, 나, 동생으로 된 여정에서는 꽤 편안했는데 심지어 그마저도 집으로 오는 길에는 내가 너무 즐거워하면 안 될 것 같았던 마음이 은근하게 선명하다. 생각해 보니 나의 원가족이 이혼으로 뚱땅뚱땅 분리되지 않은 4인체제였을 때는 이 불편함이 다 아빠 때문인 줄 알았다. 이 또한 엄마 때문이다. 불편한 게 불편한 것인 줄 엄마가 불편한 대상이었는 줄을 인지하게 된 것도 내가 만 스무 살이 훨씬 지나고 나서였다. 이 또한 엄마를 탓하기보다 그냥 그렇다는 고백으로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얼마 전 작은 앨범에서 나와 동생이 초등이거나 그보다 더 어린 시절의 가족사진을 봤는데 내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웃고 있거나 평범해 보여서 놀랐다. 그때도 나는 뭔가 즐거운 척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는데, 다행히 사진에는 그 척이 빠진 것 같아서 다행이기도 하고 약간 슬프기도 했다.

 

엄마는 여행길에 혹은 가기 전 갔다 오고 난 후 셋 중에 하나는 꼭, 혹은 모두 다 아팠다. 멀쩡한 적이 거의 없었다. 엄마 말로는 아빠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게 불편해서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 몸이 안 따라주는 거랬다. 일차적으로 나는 아픈 엄마를 보는 게 불편했다. 그리고 어쩌다 멀쩡해도, 분명 불편하거나 맘에 들지 않는 걸 얼굴에 가득 품었다. 그 얼굴보다 무언의 불편한 분위기를 기억한다. 엄마는 어린 내게 아빠가 잡은 숙소가, 함께 갔던 일행이, 우리가 갔던 밥집이 그 밖의 많은 게 별로라고 했다. 하나를 가더라도 제대로 된 곳, 깔끔하고 그런 데를 간 적을 본 적이 없다며 딸인 나한테 투덜거렸다. 나도 그곳이 엄청나게 쾌적하거나 깔끔하거나 모두가 좋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엄마가 말하지 않았다면 그냥 그러려니, 좀 꼬질하고 이상한데 그래도 그러려니 했을 것 같다.

 

지나고 나서,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혼을 하고도 한참 지나고 나서야 엄마는 자기가 아빠랑 전혀 소통에 노력조차도 하지 않았음을 고백했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우리 남매에게도 미안해했다.


 나 거기까지였다. 내가 내 잘못을 인정한다고, 과오를 뉘우친다고 해도 그 과거까지 미화되진않는다. 이게, 내가 남편과 기분 나쁜 게 있어도 아이 앞에서는 이를 악물고 큰소리가 나지 않도록 인내하는 이유다.



이번 서천해수욕장을 가면서 남편이 많이 들은 옛날얘기를 또 했다. 아빠(시아버지)가 트럭만 타고 다니던 시절 가족넷이 꾸깃꾸깃 앉아서 엄마가 콧바람 쐬고 싶다고 하면 가끔 여기 왔다고. 춘장대해수욕장에도, 홍원항에도. 거기서 우리 집은 갑오징어도 회도, 다른 생선이나 수산물을 꼭 사 왔다고. 여행지에서 그지역의 특산품이나 무언가를 꼭 사 오시는 시부모님의 모습도 나는 낭만적으로 보는 것 중 하나다. 나는 여태까지 관광지에 가서 뭘 사는 건 다 사기인줄 알았고, 바가지에 멍청한 행동인 줄 알았을 만큼 엄마아빠가 모두 뭔갈 사주지도 않았고, 사는 것도 보질 못했다. 하지만 나들이 가서 그게 바가지요금일지라도 먹거나 사는 것이 필수코스인 남편네 식구에 속해있을 땐 난 늘 속으로 어린애처럼 즐겁고 낭만으로 생각했다. 남편은 그 트럭이 좁고 불편했고 일종의 가난의 상징인 것처럼 어쭙잖게 얘기했지만, 그런 것조차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의 성정에도, 좁은 트럭에 남자 셋과 여자하나가 타고서 편도 두 시간 거리를 왔다 갔다 하면서도 정신적으로 아픈 사람 없이 떠나는 곳의 정취를 누릴 수 있는 성인들로 이루어진 가족의 조합이 듣는 것만으로도 이토록 따뜻함이 전해져 왔다


그 당연하고도 평범한 따뜻함을 먹고 자란 아이가 커서 맺은 인연과 그가 일군 가족이 다시 그곳에 갔다. 아이와 함께하기 시작하면 모든 여행은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위주로 꾸리게 됐다. 일정도, 행위도, 소품도, 짐도. 그래서 솔직히 나는 그 준비과정이 아주 피곤하고 재미없었지만, 이런 마음 또한 적당히 감추고 감내하며, 가족여행의 낭만을 누렸다. 일상 준비물을 뺀 해변물놀이나 여행소품을 거의 아빠가 준비했다고 과언이 아닐 것이었다. 나는 튜브며, 파라솔이며 사들이는 남편을 보고 왜 저래했었다. 그도 모자라 자꾸 나보고 아쿠아슈즈며 애기구명조끼며 뭘(아주미리) 자꾸 사놓으라고 해서 되게 귀찮다 증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정확히 그 귀찮음의 미덕을 톡톡히 누렸다.

귀찮은게 아니라 엎드려 절해야 할 것 같다.


해루질을 하러 가는 저녁에는 남편이 머리에 손전등을 썼다. 원래 모자 위에 쓰는 건데 모자를 숙소에 두고 와서 그냥 쓰면 분명 빙구 같을 거라고 실실거리며 쓰며 그 남자가 여섯 살짜리 아들과 손을 잡고 걸어갔다. 근데 앞모습 아니고 뒷모습만 봐도 진짜로 빙구 같아서 나는 소리 내서 웃었다.

지는 해의 모습에는 온몸의 털을 솟아내 가며 감동이라고 호들갑 떨었다.


웃다가 진짜로 울지도 몰랐을 가족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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