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SP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해외 연구를 기반으로 밝혀진 Highly Sensitive Person, 즉 고도로 민감한 매우 예민한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렇다고 어떠한 진단명이나 질병은 아니고 특정한 기질 타입을 뜻하는 하나의 유형이다.
이 유형의 사람들은 정서적인, 감각적인 외부 자극에 대한 영향을 남들보다 더 크게 받기 때문에 자극이 많을수록 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한 마디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극이 많은 환경, 많은 사람들이 있는 장면을 점점 피하게 되기 쉽다. 느닷없이 누군가는 듣도 보도 못한 이 기질 유형을 소개하는 이유는 바로 내가 이 유형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 과민한 기질에 속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것도 육아를 통해.
아이들이 우는 소리야 그렇다 쳐도 너무 크게 웃는 소리에도 내가 예민해진다는 걸 육아하며 알게 되었다. 솔직히 그럴 때마다 속으로 회의감이 들었다. 아니 애들이 즐겁고 신나서 웃는 건데 그게 이렇게 힘들일이냐 싶어서. 체력이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애들한테 '조용히 좀 해라', '목소리 좀 줄여달라'는 말만 입에서 앵무새처럼 내뱉는 나를 볼 때도 비슷한 마음이었다. HSP의 특성에 대해서 알아갈수록 내가 왜 그랬는지 비난이 아닌 이해를 하게 되었다.
HSP에 대해서 처음 듣게 된 건 동료 치료사 선생님으로부터였다. 함께 일한 인연으로 만나 이제는 친구가 된 선생님이 최근 HSP에 대한 책을 읽었다며 알려주셨는데 나는 당연히 내가 아닌 남편을 떠올렸다. 입맛이 까다롭고 정리도 중요하게 여기는데다 영화든 드라마든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는 장면에 본인이 더 스트레스를 받아 보기 힘들어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HSP에 대한 내용과 자기관리 전략 등을 남편에게 보내줬고, 실제로 남편도 자기 사용설명서냐고 할 정도로 자신이 과민한 유형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반면 나는 내가 관계에 대한 민감성은 높지만 감각적인 부분이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둔감한 편이 아닐까 하고 살아온 사람이다. 오히려 남편을 보며 아이고.. 저렇게 예민하면 참 인생살이 피곤하고 고달프겠다ㅉㅉ 하며 바라봤달까.
그러던 내가 처음으로 스스로를 HSP로 의심하고 테스트를 해본 날은 어느 날 아이들을 재우고 난 뒤였다. 어느 순간 또 다시 귀가 예민해지면서 정말 짜증부리고 싶지 않은데도 입에서 거의 호소하듯이 조용히 좀 해달라고, 엄마 귀가 아프다고 연거푸 내뱉었던 날 밤이었다. 그 힘든 소리들 중에는 아이가 어딘가에 부딪혀 아파서 낸 소리인데 이게 정말 귀가 아플일인가, 아픈 아이 앞에서 잠시 걱정도 했지만 결국 또 귀 통증을 호소할 일인가 하며 또 잠시 회의감에 빠져있다가 문득 HSP가 떠올라 테스트를 해봤다. 손으로 하나하나 꼽아보며 문항들을 보면서 아... 내가 왜 나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싶었다. 나는 해당 기준보다 많은 항목에 YES로 답했다. 그렇게 내가 과민감성을 가진 엄마라는 걸 처음 알게 된 날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랬던거구나...'하는 묘한 안도감과 동시에 '그럼 이렇게 타고난 걸 대체 어째야 하지...'의 막막함이 뒤섞여 복잡해지는 밤이었다. 일단 인정하고 나서 다시 돌아보니, 내가 30여년이 넘게 스스로가 HSP인줄 몰랐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열심히도 '자극들을 피해다니며' 살아왔기 때문이었다. 공공화장실 같이 불쾌한 냄새가 날 법한 공간에 들어가면 자동적으로 입으로만 숨쉬며 코로 냄새를 맡지 않았다. 닭발같이 단 한 입도 먹어보지 않았지만 식감 등 내 입맛에 맞지 않을 것 같은 찜찜한 음식들은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다.
만나면 만날 수록 어딘가 불편하고 집에 와서도 어떤 순간들을 곱씹게 되며 생각이 많아지는 관계는 더 이상 만나지 않는 걸 선택했다. 평생 친할 것 같은 인연도 끊어내는 나를 보며 남편은 '전 남친(같은 존재)'가 참 많다고 하기도 했다. 물론 상대에게 말해볼 법한 사유라면 당연히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고 이어갈 수도 있었을테도 그런 관계도 있긴 했지만, 관계가 끊어진 경우는 대부분 상대가 안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그 사람 고유의 어떤 부분이 나에게는 자꾸만 불편하고 힘든 자극인 경우였다. 그걸 말하면 마치 '그냥 너라는 사람이 불편해'라는 뜻처럼 들려 상대에게 상처밖에 되지 않을거란 생각에 표현할 마음을 접곤 했다. 무엇보다 나는 어린시절의 기억이 소수의 몇 가지 순간 말고는 없다. 동생 두 명에 비해서도 절대적으로 기억의 양이 적다. 이 이야기를 상담가서 했더니 선생님은
살기 위해 차단하는 걸 선택했던 거네요
라고 얘기하셨다. 내 생존전략으로 나는 불편한 감각, 정서 자극들을 열심히 피하고 차단하며 살아온 것이다. 실제로 오히려 HSP인 사람들은 대놓고 '예민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이 불편해한다는 걸 상대에게 드러내는 것도 상대에게 불편할까봐, 그 영향이 다시 스스로에게 올까봐 티내지 않기 때문이다. 정서적 자극에도 예민하기 때문에 상대의 상태에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니 남들에게 예민한 사람이라는 평가도 거의 받은 적 없다. 나도, 내 주위 사람들도 (나 못지 않게 민감한 남편조차도) 모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다.
문제는, 내가 매우 예민한 '엄마'라는 것이다. 엄마란 무엇인가? 적어도 아이들이 10대가, 아니 20대 성인은 되어야(어쩌면 그 이후일수도...) 내가 힘들어하는 감각적 자극(아이의 울음, 떼, 짜증, 큰 웃음소리, 싸우는 소리...)과 정서적 자극(아이의 순수해서 더 다이나믹하고 날 것인 모든 감정들...) 뿐 아니라 아이들로 이어지는 새롭고 불가피한 관계들(친구 엄마들, 선생님들, 그 외 아이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까지 아무 것도 원하는만큼 피하거나 차단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니 새삼 이제 와 내가 HSP인가? 의심하고 테스트를 해보게 된거겠지...
다행히 자주 막막해하는만큼 적극적으로 해결을 찾아나서는 나는(어쩌면 이것도 '막막함', '무력함' 등의 불쾌한 정서로부터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일지도?) 또 열심히 이런저런 연습과 시도들을 하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그 과정에 대해서 적어보려 한다. 오늘의 글을 읽으며 '혹시 나도...?' 라는 생각이 한 번이라도 들었다면 아래 링크를 통해 테스트를 해보기 바란다. 지금까지의 내 결론이자 다음 글의 제목은 '예민한 엄마의 육아는 달라야 한다' 니까. 맞을거면 빨리 맞고(?) 빨리 받아들이고 헤쳐나가자 우리!
https://www.idrlabs.com/kr/highly-sensitive-person/test.ph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