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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skerJ Jun 29. 2024

내가 이런 사랑을 받아도 될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만나기 전부터 나는 이기적이었다. 아기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내가 아기를 갖고 싶고 엄마가 되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나도 남들이 하는 건 다 해보고 싶다'는 욕심이었으니까. 그러다 그 남들 다 하는 임신이 쉽게 되지 않자 욕심에 조바심이 들러붙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시험관을 해도 임신이 되지 않았을 때에는 서러움까지 더해져 그야말로 심술과 자격지심으로 볼이 커진 두꺼비 같았다 내 내면의 모습은.


난임 기간에 읽었던 소설에서 어떤 구절을 보고 오열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름을 알기 전부터 너를 사랑했다'는 엄마의 마음을 표현한 문장이었는데, 큰 줄거리와도 무관한 그 한 줄에 나는 마치 그런 사랑을 준비해놨는데 왜 오지 않는지 대상도 없이 원망스러워 그리 울었다. 그러던 내가 둥이를 만났다.


임신 기간에도 어쨌든 일반 임신이 아닌 둥이 임신이니 노심초사의 마음으로 심장소리를 수시로 확인하며 보냈다. 배가 빠르게 불러왔고, 어떤 자세로도 불편한 몸이 되었을 때에는 그저 빨리 만날 날만 기다렸다. 성별을 확인하기 전의 마음도 역시 나는 내 위주였다.

아들 둘이면 키울 때 힘들다던데... 역시 끝까지 사이 좋게 지내려면 자매가 좋을까? 남매는 아들 딸 둘 다 있어 좋지만 크면서 결국 서먹해지려나?


내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매였던 우리 둥이는 주로 부러움의 시선을 받으며 자라고 있다.


출산을 하고, 육아를 시작하고 나서야 나는 철저히 깨달았다.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걸. 모성애의 개념에 꽤 많은 부분은 환상이라는 지방이 껴 있다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걸 차치하고라도  나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많이 없었다. 특히 수면과 관련해서는 거의 인내심이 바닥이었다. 그런 내가 3,4시간마다 깨어 아이 둘을 먹이려니 정말 죽을 맛이었다. 살면서 이렇게 일정 이상의 수면을 타의로 보장 받지 못했던 적이 없었으니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몰랐을 법 하다.

 

밤중 수유가 끝나고도 통잠 잘 수 있는 시기는 한참 뒤에야 왔지만 이번에는 걸어다니고 자아가 생기며 자기 표현도 늘었지만 말은 못하기에 짜증과 울음으로 의사를 표현하는 걸 받아내는게 힘들었다. 이제는 상담을 받으며 왜 그렇게도 힘들었는지 좀 더 깊게 이해하게 되었지만... 이해와 여유는 또 별개의 문제이기도 하다.


아이 둘을 동시에 키우게 되면 어느 쪽으로든 마음이 기울어질까...? 나조차도 궁금했던 그 질문 역시 내 위주의 답이 나왔다. '누구든 말 잘 듣고 안 힘들게 할 땐 이쁘고, 짜증내고 울면서 나 힘들게 할 땐 밉고...' 이마저도 참 이기적인 나의 대답.


그런 내가 무해하고 해맑은 사랑을 받고 있다. 물론, 이기적인 내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우리 둥이로부터. 그래서 지금도 문득 의아하다. '얘네는 왜 이렇게 나를 좋아하지...? 나 별로 안 잘해주는데.. 화도 잘 내고 단호한데...역시 보호자라 어쩔 수 없이..?' 어째 추측하는 것마저도 내 기준이다.


보호자라 좋아한다기엔 내 옆에만 한 없이 들러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둘이서 따로 또 같이 꽤 잘 논다. 가끔 급하게 마트에 후닥닥 둘만 놓고 다녀와도 허겁지겁 다녀온 나를 뭘 그리 급했냐는 표정으로 태연하게 잘 있는다. 어제 미리 말해두긴 했지만 엄마 아빠 하루 자고 내일 바로 데리러 오겠다는데 할머니네서 쿨하게 인사하며 보내준다. 솔직히 서운함은 1도 없고 그저 고맙다.


그들의 해맑은 사랑은 내가 뭘 해줄 때보다 함께 뭘 하는 걸 좋아할 때 느껴진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일상에서 농담을 주고 받으며, 간지럼을 태우며 깔깔 거릴 때, 같이 책이나 영상을 보며 이야기 할 때, 자신이 하는 걸 내가 관심가져 줄 때 눈이 반짝이고 세상 행복해한다. 그런 순간마다 더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야지 다짐하고도 다음 날 여지 없이 단호한 나인데도 그렇다.


"엄마가 나 잘 때 화내면 무서운 꿈 꾸고, 토닥여주면 행복한 꿈 꿔요~" 라고 딸이 말할 때. 다른 가족들 다 두고 마트 간다는 나를 따라나서는 아들에게 왜 엄마 따라오냐고 물으니 "엄마는 친절하고 잘해주잖아요." 라고 (내가?) 아들이 말할 때. "엄마 품은 포근해~" 하면서 아침부터 코알라처럼 착 안겨 있는 딸을 볼 때, 혼자만의 공간에서 책을 읽고 있으면 어떻게든 앉은 의자와 내 등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여기에서 조용히 있겠다며 그 틈에 자리잡고 나에게 붙어 있으려 하는 아들을 볼 때 나는 그 순수한 애정에 약간 어리둥절한 마음이 들곤 한다.

 

이 넘치는 사랑을 무려 두 명한테서 동시에 받는 나는 그 순간순간에는 알아차리지 못하다 아이들을 재우고 얼마간의 여유가 생겨서야 오늘의 사랑을 곱씹으며 고마워한다. 그 시점을 조금 더 땡겨 그 순간에 눈을 맞추고 고마움을 어떻게든 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희들이 커서 엄마처럼 어떤 조건으로 날 사랑하게 된다 해도 나는 이 듬뿍 받은 순전한 사랑으로  다 괜찮을 수 있을거야. 어쩌면 그 때가 되어서야 드디어 너희도 엄마처럼 자신을 우선으로 하는 사랑을 하게 되었구나 싶어 안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 벅찬 마음이 때로는 무겁기도 하니까. 그래도 가끔은, 이 친구들이 나를 이만큼이나 좋아해 주는 데에는 나도 얼추 괜찮은 엄마라는 뜻이 아닐까 하는 기대도 살짝 해본다. 어느 쪽이든, 고마워. 고이 간직했다가 엄마가 살면서 작아질 때마다 이 귀한 사랑을 받았던 나라는 걸 기억하면서 다시 힘을 낼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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