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같은 잘못을 반복할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A에서 B가 되지 않는 이상은, 최소한 A'가 될 때까지는 마치 늪에 빠진 듯 한참을 허우적대기 마련이다. 한 번의 실수를 용서하는 것은 쉽다. 말 그대로 '실수'이기 때문에, '한 번'이라는 점과 '의도가 없다'는 점을 감안해주는 것이다. 문제는 실수가 반복되면 그것은 더 이상 실수가 아니라 잘못이 된다는 것이다. 실수의 일회성이 사라지고 나면 의도가 없다는 부분 또한 신빙성을 얻기가 어려워지고, 본인은 실수라고 믿을지라도 실은 고의가 있을 거라는 쪽으로 기울기 마련이다.
실수가 잘못이 되면 그만큼 용서도 어려워진다. 오늘의 내가 그렇다. 아이에 대한 건 특히나 엄격해서 한 번의 실수도 어렵게 참고 넘어가는 편인데, 그 실수가 여러 번이 될 때에는 나를 들들 볶아가며 한 푼이라도 더 쥐어짜 내려는 독한 빚쟁이처럼 굴게 된다. 눈물을 뚝뚝 흘려가며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잘못을 시인해도 비난은 쉽게 그치지 않는다. 내 잘못에 대한 희생양이 아이라는 이유로. 그 아이가 한없이 약하고 나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이유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에도 용서는 쉽게 되지 않는다.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잘못이 거듭되었다는 뜻이므로 앞으로는 어떻게 믿을 수 있냐는 논리다.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진다. 오갈 데가 없어진다. 그 순간 잘못과 나는 별개의 무엇이 아니라 하나의 뭉텅이가 되어 내 존재에 그 잘못이 문신처럼 새겨진다. 어딜 가든 볼 수밖에 없는 이 문신으로 인해 나는 자꾸만 참담하게 가라앉는다.
다시 냉정하게 생각해본다.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몰아붙이는 것이 앞으로의 잘못을 방지하는 데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동안에도 '용서하지 않음'은 잘못과 비례하게 반복되어 왔으므로 오늘의 잘못은 효과가 미미하다는 걸 증명한다. 그러나 다른 방법을 찾기가 어렵다. '절대로 용서하지 않고 끝까지 비난하는 것'이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이기 때문에 이 이상으로 더 센 무언가를 해야 할지 알지 못해 막막해진다. 사실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다. '용서하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 있다는 걸. 그러나 이걸 쓴다는 건 나에게 절대로 놔선 안 되는 목줄을 놓아버리는 것과 비슷한 두려움이 들게 한다. 목줄을 놓는 걸 생각하면 지금의 잘못 정도가 아니라 어딜 가서 더 큰 어떤 사고를 칠지 알 수 없어지는 것처럼 아득해진다.
그럼에도 오늘의 내가 나의 잘못을 결국에는 용서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것은 다름 아닌 오늘의 육아를 위해서다.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나 아닌 누구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실제로 세상을 알아나가면서 끊임없이 실수를 거듭할 수밖에 없는 아이를 대할 때 나는 필요 이상으로 엄격해지곤 한다. 돌아서자마자 그 엄격함에 스스로가 속상해질 지경이다. 육아에 있어 단호한 것과 용서하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별개이다. 아이의 실수는 애초에 용서의 대상이 아니라 다시 한번 잘 알려줘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이걸 적용시켜줄 수 있을까. 아이도 세상이 처음이지만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용서하고 다시 한번 잘 알려줘야 한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몸만 어른일 뿐 어느 한 구석에는 내 아이만큼이나 어린 내가 있다는 걸 봐줄 수 있을까. '용서하는 것'도 결국 연습이 필요하다. 더듬더듬 다소 억지스럽더라도 스스로를 다독여본다. '뜻대로 되지 않아서 속상하구나. 마음이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다음번에 이 잘못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잘 생각해보자.'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하는 거야? 이 정도면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는 거 아니야?' 다독이려는 나와 용서하지 않으려는 내가 신경전을 하게 되고 그 사이에서 자꾸만 쪼그라들면서도 목줄을 조금씩 더 느슨하게 해보려 한다. 놓아줘도 된다. 충분히 잘 알려주고 다독인 뒤에 놓아주면 된다. 나아가다가 또 같은 늪에 발목이 잡히면 다시 가서 빼내 주면 된다. 그게 내가 A에서 A'로 나아갈 수 있고 내 아이를 너그럽게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다.